2003년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황정민과 문소리의 섹스신은 상당히 파격이었다. 그러나 실제 파격적인 장면은 죽어가는 아버지(김인문)가 갑자기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가족들은 모두 민망해하며 노랫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
1960년대 한국 지식인의 대명사는 ‘빨갱이’로 분류될 수도 있다. 말을 잃은 지식인으로 ‘비존재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상외로 우리 사회에 많다는 걸 2020년대 들어 많은 국민들은 영문도 모르게 지켜보게 된다. 그 엄청난 진보주의자들 후손들의 집단적 커밍아웃으로 인해...
한국에서 헤겔 철학을 말할 때 임석진 교수의 이름은 언제나 대문자로 들어간다. 임석진은 1987년 창립된 한국헤겔학회장을 맡아 20년간 이끌었으며, 헤겔의 ‘정신현상학’, ‘논리학’ 등을 번역하는 등 평생 헤겔 연구에 몰두한 사람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그 유명한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감화되어 ‘테오도르W.아도르노’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박사학위를 따러갔다. 4.19가 일어나 1961년 불과 29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로 취득한 세계적인 천재였다. 그가 번역한 “정신현상학”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헤겔 박물관에 영구 전시되어져 있다. 이런 세계적인 철학자가 두 번 월북해 평양에 다녀오고, 유학생들을 포섭해 평양에 보낸 사람이라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임석진은 진보주의자들에겐 조선인민공화국을 배신한 인간이자 “동백림 사건”을 터떠린 밀고자이다. 1967년 그 엄청난 관련자 315명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의 고발자가 바로 임석진이다. 관련자들은 그의 밀고로 중앙정보부에서 폐인이 되거나 대한민국을 영원히 등지게 된다. 시인 천상병은 그때 받은 고문으로 정신이 이상해지고, 윤이상은 평생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이응노 화백 역시 고국의 땅을 더 이상 밟지 못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임석진이나 송두율 같은 이들에게 월경은 ‘자유’의 의미였을 것이다. 근데 두사람 다 평양에 들어가자마자 조선로동당에 입당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송두율은 입당을 방북한 사람들의 흔한 통과의례라 말한다. 다큐영화 ‘경계도시2’에서 송두율은 “첫 북한 방문때 받았다는 ‘주체사상 교육과 노동당 입당은 1970년대 북한을 방문한 방문자들이 거치는 일종의 불가피한 통과의례”라고 해명하는 말이 진실일까?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실로 입당 문제는 가볍지 않다. 6~70년대 대한민국 사람이 북한에 들어가 입당을 한다는 건 체제 선택이자 한쪽을 파괴하겠다는 동의서다.
북의 간첩으로 와서 체포되어 40년간 비전향 장기수롤 살았던 ’허영철‘(1920~2010)을 보라. 그를 보면 당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난 자랑스런 로동당원”이란 자의식은 진리에 가깝다. 임석진이 서울에 돌아와 교수로 살면서도 한번 더 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조선로동당 입당은 귀국이란 ’전향적‘행위를 했음에도 존재 전체가 걸린 선택으로 볼 수 있는 문제다. 지금까지의 행위는 명백한 체제선택을 한 행위다. 이런 임석진이 동백림의 사건을 고해성사한다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교수란 타이틀로 충족한 일상을 주류 신분으로 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동아줄은 딱 하나 대통령 박정희에게 직접 자수하는 것 밖에 없다. 임석진의 동아줄은 홍세표란 은행원 뿐이었다. 홍세표는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장남이었다. 그가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에 근무할 때 임석진이 공작 차원인지 알 수 없으나 홍세표와 상당한 친분을 형성했었다. 그가 처음엔 임석진의 고백을 듣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나 김종필 공화당의장을 소개하려하자 임석진이 애원하 듯 홍세표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도처에 북괴에서 심어둔 사람들이 있다. 귀국해서 보니 교수 사회나 정보기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며 강한 불신감을 나타내며, 오로지 대통령 박정희에게 직보하겠다는 겁니다”. 임석진의 생각은 결은 같지만 약간은 달랐다. 헤겔 전공자로서 토론적이고,철학적 자수를 하고 싶어 대통령 박정희를 만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임석진을 향해 고도의 현실주의로 폄하 할수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심도있는 임석진의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들어 준 다음 그가 다치지 않게 김형욱이 그려낸 동백림 사건의 나레이션을 하도록 해준다. 이데올로기는 관념과 허위가 아니라 현실을 끄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박정희는 잘알고 있다는 걸 임석진도 알았을 것이다.
박정희를 독재자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작 무서운건 개인의 독재가 아니라 대중다수의 독재는 훗날 책임도지지 않는 독재다.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현대 민주사회에서 위험한 건 단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다수에 의해 벌어지는 독재다. 가수 임영웅 사태, 그리고 충암고 교복을 입어면 봉변을 당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편에 서지 않는 국민은 내란죄 공범으로 취급하겠다는 오만방자한 자신감은 대중다수가 집단 행동을 하면서 보여주는 힘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