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 그 삶의 문양
든 바다에 다가선다. 바람 없는 굼뉘가 길게 줄지어 넘실거린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들고 나간 미세기 자국이 선명한 모래 벌에 내려선다. 작은 씨앗 같은 알갱이들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사각사각 밟힌다.
물마루에 경계 잃은 두두룩한 부분에는 큰 당도리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띄워져 있다. 뒤척이는 파도에 떠밀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수십 번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파도타기에 도전장을 내미는 이들이 보인다.
나의 생은 그랬었다. 조금만 힘겨워도 엄살 부리며 회피해온 시간 들이었다. 흔한 핑곗거리를 찾아 말에 변명의 장식을 달았었다. 아님을 스스로 옳음으로 합리화해 온 삶이 아니던가. 속내는 실패의 두려움이 아니라 결과에 다다르는 과정이 힘겹다는 것을 예측하기에 도전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도전에 응원을 보낸다.
파도 등성이에서 무동을 타던 배 한 척이 깊은 어딘가에 닻을 내린다. 바다의 깃을 물고 온 파도는 갯바위에 연신 부딪치며 먼바다의 매운 생을 하얀 포말로 부려놓는다. 피하지 않고 무심히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은 갯바위의 숙명.
악착같이 맞서 이겨내는 갯바위의 움푹한 멍 자국이 애처롭지만 왜인지 늠름함이 보인다. 그토록 긴 세월 맨살 파고드는 진통이 왜 아프지 않았겠는가. 왜 그 삶이 비리고 짜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견디고 참아내는 갯바위는 지금을 살아야 하는 분명하고 확고한 이유를 말해 주는 것 같다.
가슴 가득 환하게 불이 밝혀지는 듯하다. 물새 머문 바닷가에 무럭무럭 성숙해지는 삶, 물결의 길이 구불구불하지만 느리게 천천히 아주 가까이 다가선다. 물빛이 저리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품을 수 있는 어떠한 힘을 가졌기에 그러하리라.
허공을 부둥켜안고 길게 이음새를 박음질 해놓은 듯 수평선 끝자락의 먼 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모래 한 줌 보이지 않는 바다 속의 틈을 비집고 출렁이는 파도에 악착같이 생명을 박아 넣는 조개들의 삶.
작은 돌멩이 같은 생명들이 한없이 넓은 바다에 모두는 그들을 무모하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돌한 조개의 딱 다문 입술에 담긴 외고집으로 생명을 지키고 또 새로운 생명을 번식시켰던 힘. 그것은 조개를 안아주는 바다의 품이 넉넉한 탓일 것이다. 조개의 딱딱한 삶이 느리고 더디게 가더라도 멈춤은 없을 것이다.
바다 속 수많은 생명들이 한 자락 파도의 흐름을 깔고 누워 물빛 위로 비상하는 바닷새의 자유를 부러워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먼 곳의 이야기를 들고 오는 파도의 수다가 있어 결코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한껏 응어리져 있는 새파란 바다. 삼각뿔 견치를 드러내며 쓰다듬지 않고 쪼아대는 파도를 고스란히 안는 갯바위. 기린처럼 길게 목을 빼 들어 거친 호흡을 달랜다. 생은 그래야 했다. 삶은 지금도 그래야 한다.
파도의 날에 베어지는 절대절명의 가슴앓이. 갯바위는 아프게 생채기 내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서러운 멍울을 보듬고 망연히 생의 뒷면을 배회하는 아픔을 우두커니 지켜낸다. 때때로 비틀거려도 오롯이 지켜온 날들이었다. 외롭고 서러워도 언제나 욕심도 버렸다. 들어서는 파도를 한 줌도 담지 않고 비워내며 파도 한 방울조차도 바다로 들게 한다.
기침 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살이 해진 늙은 어선의 출항 소리가 바다에 울려 퍼진다. 지나간 자리에 물거품이 꽃처럼 피어나는 물띠가 바다의 침묵을 깨뜨린다. 꽃의 향기보다 더 두툼하게 비릿한 향을 어부는 사랑 했을 것이다.
매운 바닷바람에 마음 시리고 아리면서도 어부는 사랑의 망을 더 넓게 펼치며 바다를 지켰을 것이다. 갯바위가 순정의 날들로 자리를 지키듯 어부는 사랑의 날들로 자리를 털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어머니가 털어내지 못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가장 이타적인 사랑을 쏟아냈듯이. 모든 어머니의 삶은 그러하리라.
정신이 혼미해진다. 마치 무아의 경지에 완벽히 자연의 일부가 된 듯 감탄사가 절로 난다. 하늘을 태우며 붉게 물드는 까치놀의 경관이 수평선에 펼쳐진다. 고여서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에 가만가만 밤이 드리워진다.
△김미정 수필가는 한국문인협회와 한국미술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해양수산청 등대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과 2024년 서울시 환경문화대상 수필부문 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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