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국회의 경제 법안 처리율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개원한 21대 국회보다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둔화 우려 속에서 거대 야당이 반도체특별법, 전력망확충특별법 등 산업 근간을 뒷받침해야 하는 민생 법안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22대 국회 개원 첫해(2024년 5월 30일~12월 31일)에 발의된 경제 법안은 총 2917개였다. 이 가운데 본회의에서 처리된 법안(대안반영폐기 포함)은 397개로, 13.6%에 불과했다. 반도체 재정 지원 근거 등을 담은 반도체특별법, 첨단산업 전력 수요 지원을 위한 국가기간전력망확충특별법, 사용 후 핵연료 처분 시설을 건설하는 고준위방폐장법, 국가 주도 해상풍력 발전 지구를 지정하는 해상풍력특별법 등 한국 경제와 산업 육성에 시급한 법안들이 산업계 호소에도 불구하고 처리되지 않고 있다.
4년 전인 21대 국회의 경우 개원 첫해(2020년 5월 30일~12월 31일) 발의된 경제법안 2724개 중 16.6%인 453개가 같은 해에 바로 본회의에서 처리됐다. 처리 법안 수로도, 처리율로도 22대 국회가 21대에 비해 뒤처지는 셈이다. 경제 법안은 정무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국토교통위원회 등 경제 관련 상임위 6곳 소관 법률안을 취합해 분석했다.
통상 국회 개원 첫해는 새로 등원한 의원들이 의욕적으로 국가 경제와 민생 현안에 대응하는 시기다. 코로나19가 한창이었던 2020년 5월 30일 시작한 21대 국회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등 쟁점 법안을 둘러싸고 여야 정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코로나 대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안은 여야 합의를 거쳐 서둘러 통과시켰다. 소득세법·조세제한특별법 개정안 등 의견 차가 덜한 경제 법안은 민생에 중요하다는 공감대 속에 정쟁과 관계없이 같은 해 12월 통과시켰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여소야대로 시작한 22대 국회는 여야 간 정쟁을 거듭하며 중요 경제 법안 처리는 뒷전으로 내몰렸다. 특히 12월부턴 계엄·탄핵 정국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올스톱’됐다. 지난달 31일 국회는 2024년 마지막 본회의를 열었지만, 여기서도 주요 경제 법안은 외면당했다. 과도한 입지 규제를 해소하는 신재생에너지법 개정안, 숙련 외국인 근로자의 체류 기간을 연장하는 외국인 고용법 개정안 등 ‘무쟁점’ 법안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특히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를 둘러싼 글로벌 패권 다툼이 격화되는 현실에도 ‘연구개발(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 조항을 둘러싼 여야 의견차를 끝내 좁히지 못했다. 미국·중국·일본·대만 등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은 재정 지원 근거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탄핵 정국이 길어지면서 경제적 불확실성이 더 커진 만큼 산업·민생 법안을 시급히 통과시켜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1.8%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경제 버팀목 역할을 해줬던 수출도 올해 크게 둔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오는 20일부터 출범하면서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고, 침체된 내수 경기도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트럼프 취임 직후 상당한 무역 충격이 올 수 있는데, 시나리오별로 대응해야 하는 정부가 온전치 못하다”며 “최소한 국회라도 나서서 반도체특별법 등 산업계가 호소하는 법안들부터 통과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