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리마 파시’의 주인공 ‘테사’는 늘 이기는 변호사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영국의 ‘금수저’만 모인다는 명문 케임브리지대 법대를 졸업하고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법조인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자리인 왕실 변호사 자리도 눈앞에 뒀다. 자신만만하던 그의 삶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동료 변호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이후다.

지난 8월 27일 서울 중구 신당동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한 연극 ‘프리마 파시’는 ‘연기 차력쇼’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연극은 승승장구하던 변호사가 성범죄 피해자가 된 이후 겪는 782일간의 법정 다툼을 다룬다. 1명의 배우가 약 120분간 쉼 없이 무대 위에서 감정을 쏟아내고 관객과 호흡한다. 승소에 목을 맨 ‘법 기술자’에서 공고한 법체계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는 패배자로 변하는, 한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두 세계를 1명의 배우가 오롯이 펼쳐낸다.
인권 변호사 출신 극작가 수지 밀러가 쓴 ‘프리마 파시’는 2019년 호주에서 초연됐다. 2022년 영국 웨스트엔드에 이어 202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그해 토니상 여우주연상(조디 코머), 로렌스 올리비에상 최우수 연극상 및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거쳐 올해 한국에서 초연했다.
꽤 무거운 이야기이지만 한국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9월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집계 연극 분야 총 티켓예매액 2위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서도 연극 분야 예매액 순위 5위권 이내에 꾸준히 자리하고 있다.

이 작품이 꼬집은 사법 시스템의 모순에 관객들이 공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리마 파시’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법률 용어로 그럴듯해 보이는 ‘표면상의 진실’을 뜻한다. 성폭력 피해자를 밀어내는 사법 제도의 허점을 제목이 드러낸다.
특히 이런 작품 의도를 잘 구현해 낸 배우들의 연기가 호평을 받고 있다. ‘테사’역은 이자람(46), 김신록(44), 차지연(43)이 맡았다.
소리꾼 이자람은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난 4월 초연한 창작 판소리 ‘눈,눈,눈’과 같은 작품을 통해 여러 차례 혼자 무대를 책임진 경험이 많은 이자람이지만 ‘프리마 파시’는 그에게도 극강의 난도였다.
최근 서울 대학로 인근 카페에서 만난 이자람은 “소리 없이 무대에 서는 건 처음”이라며 “며 “소리는 내가 가진 기술을 잘 연습하면 되는데, ‘프리마 파시’의 주인공을 연기할 땐 뭘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라고 웃었다.

1년 전 1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했던 김신록에게도 이 작품은 큰 도전이었다. 김신록은 “1막에서 ‘테사’는 세상의 주체이지만, 2막은 그런 1막의 세계가 철저히 무너지는 이야기”라며 완전히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데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관객들로부터 실시간으로 (제가) 살이 빠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라고 했다.
두 배우는 이 작품이 한국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고 입을 모았다. 작품 초기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놓이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는 이자람은 “재판을 마치고 다시 서는 희망을 보여주는 짧은 찰나의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는 것을 발견하고 악몽이 끝이 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작은 희망을 보여준 뒤 대화와 논쟁의 바통을 관객에게 넘긴다”라고 전했다.
김신록은 “‘프리마 파시’는 젠더를 아우르는 이야기로 우리 모두 어떤 세계를 꿈꿔야 할까 질문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라며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다음 달 2일까지 관객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