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왜 한국학이나 동양 사상이 담긴 학문을 멀리하느냐고 물으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 무대에서 살고 있는데, 세계적 사상과 학문을 제공해 주는 동양이나 한국의 사상과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 근대정신은 서양사상과 학문을 통해 르네상스 때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다. 문예부흥은 그리스부터의 인문학과 자유 정신을 계승했고, 기독교가 인간애와 공존의 사상인 휴머니즘을 접목했기 때문에 다른 세계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주류를 이끌어 온 때문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이 뿌리
유일사상이나 절대 신념 대신
대화 통해 객관적 가치에 접근
역사와 사회 발전 꾀하는 정신

다른 한 가지는, ‘지식을 배우고 많이 안다고 해서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는 그 시대와 사회가 요청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의무를 담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을 위한 당대의 방법과 역사적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과학 정신과 역사의식이다. 동양의 근대 이전 지식으로서는 학문다운 학문이 불가능하며 현대사회를 이끌어 갈 해법을 찾을 수 없다. 과학적 사유와 역사의식은 서구사회가 근대화 유산으로 남겨준 사회과학의 길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이념적 경제관, 공산주의로
그렇다면 서구 국가들은 어떤 성격의 학문과 사상을 남겨주었는가. 영국은 모든 학문과 사상적 기반으로 경험주의를 근거로 삼았다. 정치나 경제와 같은 사회과학의 유업을 남겨주었다. 프랑스는 학문의 근원을 합리성과 실증과학으로 전개했다. 그 뒤를 따르는 독일에서는 관념주의 정신이 극대화되었다. 그 결과로 영국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와 경제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아메리카가 영어문화권으로 흡수되면서 앵글로색슨의 비중은 현대사회를 주도하는 결과가 되었다.
프랑스는 문화적 창조와 예술을 주도해 왔다. 콩트(A. Comte) 같은 이의 사회과학의 학문적 기여는 컸으나 현실 정치나 경제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독일은 관념적 철학과 마르크스 같은 이념적 경제관을 창출해, 공산주의 사회를 이끌어 온 주역을 공산국가에서 주도해 왔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세계 경제와 정치는 영국을 비롯한 실용주의 사상과 러시아를 위시한 공산주의 사상의 대결로 나타났다.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국가의 탄생이 그 불행한 결과로 등장한 것도 두 세계관의 영향이다.
그러나 냉전 시대가 끝나고 보수와 진보는 대립이 아닌 공존의 질서로 정착되면서 공산주의 경제와 정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영국과 아메리카 주도의 실용주의 정신과 사상이 21세기를 주도하고 있다. 러시아나 중국도 경제는 이미 자유시장과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지 오래다.
실용주의(Pragmatism)란 어떤 정신과 사상인가. 그 뿌리는 문예부흥 이후부터 영국이 창출 계승해 온 경험주의에 있다. 경험주의는 역사와 사회적 현실에서 출발해 더 소망스러운 사회와 역사를 건설해 가는 정신이다. 공산주의 유물사관과 같이 역사 사회의 이념을 설정해 놓고 그 이념에 현실을 맞추어 가는 역기능이 아니다. 주어진 선입관념이나 고정관념에 빠져서도 안 되지만 유일사상이나 절대가치에 대한 신념은 용납되지 않는다. 역사는 발전을 거듭하며 사회는 항상 변화 진보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가 경험주의 철학의 근본이다.
그 목표와 목적이 있다면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찾아 누리게 하려는 노력이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그것이다. 소수는 다수를 따르게 되며 가난하거나 소외된 계층의 다수가 먼저 행복을 누리도록 돕는 길이다. 그 학문과 사상적 결론으로 주어진 것이 정치에서는 의회 민주주의,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복지혜택을 추진해 가는 길이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의회 민주 정치관은 이미 세계와 인류의 인정을 받고 있다. 경제의 사회정책도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가 아니면 영국·캐나다와 같은 두 방향의 하나를 택하게 되었다.
강의 위주 대신 토론 교육을
그 정치와 정책을 성공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가. 해답은 영국의 전통을 계승한 미국이 설정해 주었다. 실용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정치적 민주 정신과 경제적 가치를 모두가 찾아 누리는 방법이다. 정치와 경제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 지속시키는 결과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선한 가치의 창출이 동반해야 한다. 주어진 과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나누어 객관적 해답을 찾아 실천하는 방법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 앞으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대화를 통해 객관적 가치로 협력해 가는 방법이다. 변증법도 아니고 토론을 위한 토론에 그쳐서도 안 된다. 공산주의와 같은 대결과 투쟁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 교육까지 주어진 문제를 놓고 대화와 토론으로 문제를 풀어간다. 스스로 찾은 결론이 진리와 진실이 되며, 사회 역사적 객관성을 인정받으면 사회적 가치와 진로가 주어진다. 민주주의가 투쟁과 폭력을 죄악시하는 정치 원리와도 통하는 방향이다.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독일식의 강의 위주의 교육을 배제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이런 교육 사회적 변화가 지금은 인류와 세계의 공존 질서를 가능케 하는 평화와 자유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그 정신을 현실화시키는 노력이 실용주의다. 소망스러운 공존과 행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