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환위기를 계기로 국내 은행의 기업대출이 건전성 측면에서 유리한 부동산으로 쏠리면서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반 토막 난 것으로 확인됐다. 부동산 담보 위주의 여신이 급증하다 보니 같은 규모의 대출을 해도 국가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가 절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재명 정부의 생산적 금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금융사의 과도한 건전성 우선주의를 바꾸고 담보가 아닌 상환 능력 위주의 심사 관행부터 정착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경제신문이 1998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은행의 산업별 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예금은행의 대출액당 총부가가치가 1.67원으로 나타났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3.54원)과 비교하면 약 53%나 감소한 수치다. 은행이 국내 산업에 1원을 대출한다고 했을 때 1998년에는 한국 경제의 부가가치가 3.54원 창출됐지만 지난해에는 그 액수가 1.67원밖에 안 되는 셈이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업 대출이 가파르게 늘어난 탓이다. 부동산업이 전체 산업별 대출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1.02%에서 지난해 22.28%로 22배 확대됐다. 같은 기간 제조업 대출 비중은 47.8%에서 31.42%로 쪼그라들었다.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 같은 외환위기 전 상위 5대 은행이 기업대출 부실의 여파로 문을 닫게 된 뒤 시중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같은 안전한 가계대출에 눈을 돌린 결과다.
문제는 부동산업의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난해 기준 부동산업의 대출금당 부가가치 창출액은 0.53원으로 제조업(1.52원)의 3분의 1 수준으로 추정된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주담대와 부동산업 대출 쏠림이 심각하다”며 “첨단 제조·서비스업으로 은행권 자금을 이동할 방안을 마련할 때”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6월 말 기준 우리은행(옛 한빛은행)의 부동산담보대출 잔액은 6조 5134억 원으로 전체의 30.3%에 불과했다. 우리은행의 전신은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으로 기업금융의 대표 주자였다. 한일은 삼성그룹, 상업은 LG그룹의 주거래 은행이었다. 이 당시에는 신용대출 비중이 52%로 절반이 넘었다.
26년 뒤인 올해 6월 말 현재 우리은행의 부동산담보대출은 164조 9391억 원으로 비중이 55.1%까지 뛰어올랐다. 신용대출은 22.5%에 그쳤다. 다른 은행도 세부 수치에 차이가 있을 뿐 큰 틀의 흐름은 같다.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은행 구조조정이 잇따르다 보니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절대시되고 안정적으로 자산을 굴리는 것이 핵심 가치가 된 결과다. 이 같은 부동산 대출 확대는 집값 상승과 맞물려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금융 당국의 판단도 비슷하다. 당국 내부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금융계에 충당금 규정 강화와 여신 관리 및 부실 금융사 구조조정을 주문하면서 금융사들이 비교적 안전한 부동산 대출을 선호하게 됐다는 인식이 강하다. 특히 지난해 금융위원회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동산 대출 비중이 약 20%에 달해 10%대 수준인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는 내부 진단을 내렸다. 금융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금융 시스템은 건전성을 상당히 중시하는 쪽으로 개편됐다”며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시스템의 시효가 끝난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부동산업 대출 잔액은 1998년 말 1조 4781억 원에서 지난해 말 317조 127억 원으로 214.5배나 뛰었다. 같은 기간 제조업 대출 잔액이 69조 2006억 원에서 447조 735억 원으로 6.5배 늘어난 것에 비해 증가세가 가파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부동산업의 경우에는 토지나 건물을 담보로 삼기 때문에 일반 기업 시설·운영자금 대출에 비해 안전하게 여겨질 공산이 크다”며 “부동산업 대출이 확대된 데에는 이 같은 영향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계대출의 부동산 쏠림은 더 심각하다. 한은에 따르면 주택담보대출이 전체 가계 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말 51.7%에서 2024년 말 58.4%로 확대됐다. 주담대는 주택을 담보로 삼아 은행 입장에서 가장 안전한 대출 중 하나로 꼽힌다. 금융감독원은 국내 은행의 가계·기업 부동산 관련 대출이 지난해 말 기준 1673조 8000억 원으로 2019년 말(1167조 원)과 비교해 43.4% 증가했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이 중 가계 부문 부동산 담보가 총 771조 3000억 원으로 전체의 46.1%를 차지한다.
이 같은 부동산 금융 쏠림은 국내 경제의 생산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부동산 서비스의 생산유발계수는 2020년 기준 1.417로 전 산업(1.804)과 비교해도 낮은 수준이다. 생산유발계수가 높을수록 산업별로 창출되는 생산액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김현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동산업은 제조업에 비해 생산성이 높은 분야가 아니다”라며 “그럼에도 부동산업에 대출이 집중됐다는 것은 자원 배분 측면에서 상당한 비효율이 발생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동산처럼 교역이 어려운 재화·서비스로 금융이 집중되면 성장률 하락의 단초가 된다는 분석도 있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과도한 건전성 중시 기조가 국내 은행의 대출 관행을 담보 위주로 굳어지게 만들고 이에 자금 흐름이 기업과 생산적인 분야가 아닌 부동산으로 쏠리는 왜곡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금융 당국은 새 정부 들어 부동산 금융을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추가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리스크 관리 지표 측면에서 기업대출을 우대하는 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첨단산업 못 키우고 침체 불렀다"…스페인 '부동산금융 붕괴'의 교훈
현재 한국과 경제 규모가 엇비슷한 스페인은 1999년 유로존에 들어가면서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다. 스페인 은행들은 낮은 금리를 바탕으로 부동산 대출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 시장은 호황을 맞았고 대출액은 더 늘어났다. 1998년 말 1175억 유로 수준이었던 스페인의 주택 구입 목적 대출 잔액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말 5959억 유로까지 불어났다. 이는 집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1997년부터 2007년 사이 스페인의 주택 가격은 3.1배 급등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금융위기는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글로벌 경제에 직격탄이 됐고 부동산 대출 비중이 높았던 스페인의 경우 그 여파가 더 길고 컸다. 스페인 은행의 고정이하여신 비율은 2008년 3%대에서 2012년 3월 8.4%까지 급등했다. 이때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에서 주택 모기지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64%에 달할 정도였다.

과도한 부동산 대출에 그리스에서 시작된 재정위기가 겹치면서 스페인의 경기는 곤두박질쳤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은 대대적인 공적 자금 투입과 함께 은행 구조조정에 나서야 했다. 산탄데르은행 같은 스페인 주요 은행들도 인력 감축에 나섰다. 스페인 정부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됐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부동산 금융이 시장 거품을 키웠고 이 때문에 경기 침체가 더 길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스페인의 금융권이 부동산 시장에 몰두한 나머지 산업에 자금을 제때 공급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며 “이는 부동산 금융 쏠림이 심각한 한국에도 시사점이 크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스페인은 대규모 디레버리징을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의 고통도 컸다. 제대로 된 첨단산업 지원도 이뤄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국내 금융 당국은 스페인의 사례를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은행(방코데에스파냐)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스페인의 주택 구입 목적 대출 잔액은 약 4878억 유로다. 2008~2012년에 6000억 유로를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약 20% 줄어든 수치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디레버리징 과정의 고통을 감안하면 한국은 부동산 관련 대출 증가율을 억제하고 전체적인 여신 규모를 단계적으로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인공지능(AI)과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지원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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