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프런티어: K를 넘어서

※ 구글 노트북LM으로 생성한 AI 오디오입니다.
대 놓고 시니컬하게 접근해 보자.
여기, 유령이 있다. 이름은 FAST(Free Ad-supported Streaming TV). 북미 시장의 성공 신화를 갑옷처럼 두른 이 유령은, 한국 미디어 시장의 구원자라도 되는 양 행세하며 좌중을 압도한다. 실체는 희미하고 성과는 불분명하지만 ‘글로벌 트렌드’라는 주문의 효력은 막강하다. 기업과 전문가들이 홀린 듯 유령의 마차에 올라탄다. 기시감이 드는 풍경이지 않은가? 불과 몇 년 전, 우리는 ‘3D TV’와 ‘메타버스’라는 이름의 유령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어지럽기만 하던 3D TV는 TV장 뒤편의 먼지 쌓인 안경만 남겼고, 모두가 ‘부캐’로 출근할 것 같던 메타버스는 이제 IT 기자들조차 언급하기 민망한 단어가 됐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메타버스를 외치던 사람들은 이제 AI를 팔고 돌아다닌다.

특정 산업은 그냥 맨땅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글로벌 트렌드의 씨앗이 바람 타고 한국에 오더라도 토양과 생존 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타이밍이다. 그러나 트렌드 주창자들은 토양과 조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냥 글로벌이라는 말이면 된다. 누구도 하고 누구도 하고, 그들이 얼마를 벌었고, 그들의 시장 규모가 얼마라는 말만 하면 된다.
동일한 광고 수익이라도 FAST는 이런저런 플랫폼에 나눠 주고 나면 정작 콘텐트 사업자의 수익은 낙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다. 그냥 ‘저쪽 나라에서 하고 있고’ ‘커지고 있으니’ 조만간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게 오늘이 힘들고 미래가 불안한 이들을 현혹할 뿐이다.
미국에선 대세, 한국에선 ‘찻잔 속 태풍’인 이유
FAST의 실체를 알려면 그것이 태동한 미국 시장의 맥락부터 정밀하게 해부해야 한다. 미국의 FAST는 명확한 시장의 균열을 파고든 필연적 산물이었다. 2010년대를 관통하며 미국 소비자들은 컴캐스트나 스펙트럼 같은 케이블TV 사업자들이 청구하는 월 100달러짜리 고지서, 원치 않는 채널까지 수백 개씩 욱여넣는 ‘번들링’ 상품에 신물이 났다. 이때 등장한 넷플릭스는 혁명이었고, 이는 거대한 ‘코드커팅’ 흐름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해방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성공에 자극받은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너도나도 콘텐트를 회수해 독자 SVOD 서비스를 차렸다. 소비자들은 이제 ‘왕좌의 게임’을 보려면 HBO맥스를, ‘어벤져스’를 보려면 디즈니플러스를 구독해야 했다. 케이블TV는 피했지만, ‘구독 피로’라는 새로운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 지갑은 다시 얇아졌고, ‘오늘은 뭘 봐야 하나’라는 선택의 고통이 일상이 됐다. 채널 사업자 역시 코드커팅이 10% 진행되면 광고 커버리지도 10% 줄어드는 현실에 직면하며 유료방송 시장 밖에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바로 이 지점을 FAST가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2012~2014년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플루토TV, 투비 등은 ‘완전 무료’와 ‘린백(Lean-back) 시청 경험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가치를 들고나왔다. 구독료 걱정도, 콘텐트 선택의 고통도 없이 그저 소파에 기대앉아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됐다. FAST는 비싼 유료방송과 피로한 구독 서비스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제시한 명민한 시도였다. 채널 사업자들로서는 코드커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돌파구가 필요했다. 유료방송과 달리 광고 수익을 수수료란 이름으로 플랫폼 등에 나눠 줘야 하는 상황이지만, 코드커팅으로 커버리지가 줄어든 상황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