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룸살롱에 총장 불렀다, 대통령 아들 '홍어 회식' 비극

2024-10-03

더중앙플러스-게이트의 왕:이용호 이야기

외환위기에 국민이 신음하던 새천년 초반, 벤처기업은 새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벤처 열풍은 용감하고 야성적인 기업가 정신이 아닌 돈 먹기식 투전판으로 전락했습니다. 거기서 생긴 눈먼 돈에 권력이 손을 댔습니다.

새천년은 벤처와 함께 왔고, 벤처는 게이트를 낳았습니다. 그때부터 ‘권력형 비리 사건’은 일상어가 됐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용호는 ‘게이트의 왕’이었습니다.

중앙일보 유료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가 ‘게이트의 왕:이용호 이야기’(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83) 한편을 무료로 소개합니다. 금융과 권력의 결탁은 반복됩니다. 새천년 대사건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어가세요.

#1.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잔 부딪히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불콰한 얼굴들에서 웃음기가 떠날 줄 몰랐다. 좌장인 듯 상석을 차지한 중년 남성은 이미 만취 상태였다.

무리에게 자신을 소개한 그는 후래(後來)의 대가로 몇 잔을 잇따라 털어 넣은 뒤 방안을 둘러봤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실력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는 그중 한 명에게 눈을 맞춘 뒤 다가가 잔을 건넸다.

총장이라고 불린 이는 환하게 웃으며 눈과 잔을 맞췄다. 그 순간 김성환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에 각인됐다.

#2. “형님, 도승희에 대해 조사가 시작될 것 같은데 형님은 걱정되는 부분이 없소?”

대검 중수부의 이용호 수사가 한창이던 2001년 11월 7일. 아태평화재단 상임이사 이수동에게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용호 게이트 특별검사팀의 수사로 이수동의 금품수수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건 그로부터 석 달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전화를 걸어온 이는 이미 이수동의 연루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다음 말은 더욱 놀라웠다.

‘이용호 게이트’라는 명명법은 지극히 단면적이다. 이용호라는 금융 사기꾼에서 출발한 그 사건은 다양하게 분화하고 진화하면서 어느새 출발점을 잊게 만든 지 오래였다.

‘검찰 게이트’ ‘신승환 게이트’ ‘이수동 게이트’ ‘아태재단 게이트’ ‘보물선 게이트’ ‘처조카 게이트’ ‘아들 게이트’ ‘브로커 게이트’로 불려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총장’은 그 모든 이름의 교집합이었다.

이수동 발 비극, ‘총장’이 먼저 걸려들었다

선전포고 후 특별검사팀은 이수동에게 천라지망을 쳤다. 압수수색, 계좌 추적, 통화 내역 조회, 고강도 취조 등을 통해 그를 말 그대로 탈탈 털었다.

성긴 듯 보였던 그 그물에 많은 것이 걸려들었다. 검찰 간부들이 먼저였다. 구속 이후 조사 과정에서 무심코 내뱉은 이수동의 실언이 발단이었다.

“한 지인이 ‘이용호로부터 5000만원 받은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포착돼 앞으로 수사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정말 이용호 돈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2000년 봄에 5000만원을 받았는데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하자 그 지인이 ‘앞으로 잘 대비하라’고 했습니다.”

이수동은 이후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도승희가 5000만원을 받아 조사 대상이 됐다’는 것”이라고 진술을 번복했고, 나중에는 ‘지인으로부터의 전언’ 자체를 부인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여의도 주변에서 ‘유사 언론사’를 운영하던 도승희는 일부 동업자들처럼 브로커를 겸하고 있었다. 이수동을 비롯한 여권 유력자들과의 친분이 이용호의 눈길을 끌었다. 이용호는 그를 계열사인 인터피온 사외이사로 선임했고, 도승희는 그와 이수동을 연결해줬다.

이용호는 검찰에서 5000만원의 향배를 추궁당하자 “도승희에게 줬다”고 진술했고, 중수부는 도승희 소환을 결정했다. 지인의 전화가 이수동에게 걸려온 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문제의 지인은 광주고검장 김대웅이었다. 신승남에 이어 당시 호남 검사 중 ‘넘버2’ 격이었던 그는 대검 중수부장 등 최고 요직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수동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서울지검장이었다. 통화내역 조회 결과 김대웅은 과거 1년간 이수동과 126차례나 통화했다.

가장 중요했던 건 2001년 11월 7일의 통화였다. 중수부 수사팀이 신승남에게 도승희 등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담은 보고서를 올린 바로 다음 날이었다.

“형님은 걱정되는 부분이 없느냐”는 김대웅의 물음에 이수동이 “나는 별일이 없소”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대웅 옆에 있던 신승남이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신승남·김대웅과 통화한 직후인 11월 9일 이수동은 돌연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것도 당초 잡아둔 출국일을 일주일이나 앞당기면서다.

출국 당일에도 ‘안부 전화’는 이어졌다. 김대웅은 “며칠 내로 도승희를 조사할 테니 잘 대비하라”고 말했고, 신승남도 이수동과 별도로 통화했다. 이수동은 그날 오전 11시40분, 오후 2시, 오후 5시 세 차례에 걸쳐 도승희와 통화했다.

“내 이름이 거론되면 파문이 커질 수 있으니 자네가 이용호 돈을 받은 것으로 하세.”

도승희는 15일 중수부에 출석해 이수동의 요청을 100% 이행했다. 이수동은 도승희 조사가 끝난 직후인 17일 귀국했다.

귀국 당일에도 김대웅의 ‘형님 걱정’은 이어졌다. 그는 “형님은 돈 쓰지도 않았더구먼요. 별문제 없겠습니다”고 이수동을 안심시켰다.

중수부는 신승환·이형택에게 그러했듯 뒤를 더 캐지 않고 도승희 선에서 수사를 마쳤다. 특검팀에 넘어온 중수부 수사 기록 어디에도 이수동의 이름은 없었다.

검찰 최고위 간부들이 수사 방해를 넘어 범인 도피에 해당할 수 있는 행위를 버젓이 저질렀다. 당시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 수준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검찰총장과 서울·인천지검장 등 검찰 최고위층이 금융공기업 임원에 불과했던 이형택에게 골프 접대를 하는가 하면, 대검 공안부장이 대통령 장남의 휴가를 수행한 사실도 들통났다. 검사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이른바 ‘검찰총장 협박 의혹 사건’이란 게 터졌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용호가 중수부에 체포된 직후 신승환에 대한 송금 내역이 찍힌 계좌 사본을 이형택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이형택이 신승남을 잘 안다고 알려진 누군가를 불러 “신승남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달라 ”고 요청했다. “당신 동생이 이용호 돈을 받았으니 수사를 덮으라”는 신호, 즉 협박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신승남과 심부름꾼으로 지목된 이가 모두 의혹을 부인하면서 진상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의혹 자체만으로도 충격파는 작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또 다른 측면에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그 심부름꾼이 대통령 차남, 즉 김홍업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의 친구이자 최측근이라는 말이 나돌면서다.

“못 볼 걸 봤다”…대통령 차남의 등장

“이거 좀 이상한데?”

2002년 3월 이수동의 계좌를 추적하던 특검팀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수동과 그 부인에게 4400만원, 아태평화재단 관계자들에게 5600만원이 전달된 계좌를 발견한 직후였다. 아무리 봐도 그 계좌의 명의인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계좌 명의인의 신원을 확인해본 특검팀은 아연 긴장했다. 가정부였던 그 계좌 명의인의 고용주는 그 심부름꾼, 김성환이었다.

대통령의 아들은 처조카나 집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YS의 몰락을 불러온 대통령 아들의 구속이 불과 몇 년 전 일이었다.

정권 입장에서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였다. 다행히도 의혹이 제풀에 잦아들면서 정권은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뒤 김성환과 이수동·아태재단 사이의 돈거래 흔적이 발견되면서 대통령 차남의 이름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게다가 한 달 전 검찰총장 협박 의혹 사건 때는 선선히 출석했던 김성환이 이번에는 특검팀의 출석 요구를 거부했다.

수사관들이 김성환의 집에 들이닥쳤지만 한발 늦었다. 김성환은 계좌 명의를 빌려준 문제의 가정부로부터 “도망가라”는 전화 연락을 받고 그 길로 도주했다.

김성환은 외부에서 언론플레이를 했다. “문제의 돈은 김 부이사장에게 빌려줬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다. 하지만 ‘잔기술’이 통할 상황은 아니었다.

특검팀은 가정부 명의 계좌를 집중적으로 추적한 결과 ‘저수지’를 발견했다. 출처 불명의 여러 곳에서 유입된 돈이 흘러 고인 핵심 계좌였다.

그중 일부가 김 부이사장 주변 계좌로 유입된 흔적도 보였다. 특검팀에서 “못 볼 것을 봤다”는 말이 나온 게 이 무렵이었다.

김 부이사장 측은 김성환과 거리를 두려 했다. “유력자의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호가호위하는 인물”이라고 김성환을 깎아내렸다. 그 해명에는 진실과 거짓이 절반 정도씩 섞여 있었다.

술과 브로커…비극의 출발점

김 부이사장은 정권 교체 직후만 해도 극도로 몸조심했다. 비선 실세로 군림하다가 추락한 전임 대통령 아들의 말로를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은밀하게 역삼동에 사무실을 하나 얻어 놓고 거기 틀어박혀 지냈다.

문제는 술이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아주 많이 마셨다. ‘혼술’ 할 체질도 아니었다. 돈과 권력을 노리던 이들이 앞다퉈 그와 말술을 주고받았다.

자연스레 파리 떼가 꼬였다. 그중 한 명이 김성환이었다. 그를 둘러싼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김성환은 김 부이사장의 고교 동기이자 ROTC 동기였다. 때로 비서실장을 자처하기도 했다. 많은 이가 그를 배후의 인물과 동일시했다.

대검 중수부에서 이용호 게이트 재수사를 담당했던 변호사 I가 전해준 얘기다.

I의 말이 이어진다.

김성환 같은 브로커들은 김 부이사장이 취하면 그때 청탁을 했다. 예를 들어 ‘잘 아는 고향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데 기소 중지돼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얘기했다. 만취한 김 부이사장은 내용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응? 그래, 그래야지’라고 대충 답했다. 그러면 브로커들이 유력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김 부이사장의 지시’라면서 각종 민원을 했다. 민원을 받는 사람들은 ‘홍어 회식’ 같은 자리를 통해 김성환을 알고 있었고 목소리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윗분’의 지시로 받아들였다. ‘정말로 그렇게 지시하셨느냐’고 윗분께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런 브로커들은 김성환 외에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차남은 그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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