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벤처 업계는 전 세계적인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소외되며 씁쓸한 한 해를 보냈다. 미국이 생성형 AI 열풍을 주도하는 가운데 한국에선 고작 한 곳의 AI 유니콘을 배출했다. 벤처투자 시장이 지난해에 이어 위축되는 와중에 성장은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스타트업이 부지기수였다.
26일 미국 시장조사 기관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이달 9일까지 신규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기업은 전 세계에서 72곳이며 이 중 44.4%에 달하는 32곳이 AI 기업으로 나타났다. 유니콘 중 AI 기업 비중은 2020년 14%에서 4년만에 3배 가까이 올랐다. 2022년 11월 챗GPT가 처음 등장한 이후 여러 해외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를 선보이며 벤처 시장의 주역으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올해 유니콘에 등극한 AI 기업은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리벨리온이 유일하다. AI 외 다른 스타트업까지 포함해도 올해 신규 유니콘은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까지 2곳 뿐이다. 벤처캐피털(VC)의 한 심사역은 “국내 스타트업도 나름대로 AI 기술을 접목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지만 유니콘으로 인정될 정도로 시장에 파급력이 있는 기업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업력 20년 이상의 벤처 기업들도 막대한 자금 투입이 요구되는 AI 소프트웨어 개발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AI 성장의 과실은 미국이 독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올 9월 말 기준 전 세계 상위 100개 유니콘의 21%가 AI 기업이었으며 이 중 미국 기업이 18곳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나마 중국과 오스트리아가 각각 2곳, 1곳씩 있었으며 한국을 비롯한 기타 국가는 전무했다. 이들 AI 기업의 총 기업가치는 총 5691억 달러(약 833조 원)로 100대 유니콘 전체 기업가치 1조7433억 달러의 32.7%에 달했다.
벤처투자가 AI로 몰리면서 국내 스타트업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 벤처투자 정보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폐업한 스타트업은 144곳으로 2021년의 같은 기간(71곳)에 비해 2배 가량 늘었다. 이는 초기 창업 기업에 대한 투자가 외면받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8조5808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1.3% 증가한 반면 업력 3년 이하 초기 기업 투자는 1조5606억 원으로 24.8% 감소했다. 더구나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여파로 인해 올해 719곳의 스타트업에 대한 팁스 지원금 지급이 늦어지면서 이들 기업은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하지 못한 채 인력 감축 등으로 허리띠를 졸라 메는 실정이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벤처 업계 성장의 밑거름이 될 성과도 있었다. 올해 2월 종합 물류서비스 벤처기업인 콜로세움코퍼레이션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복수의결권을 발행했다. 복수의결권 주식은 1주당 최대 10개 의결권이 부여되는 주식으로 벤처기업이 지분 희석 우려 없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도입됐다.
모태펀드 예산 또한 증액됐다. 중기부는 내년도 벤처·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모태펀드 출자예산을 올해보다 10.1% 증가한 5000억 원으로 편성했다. 모태펀드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민간 벤처펀드에 자금을 나눠 공급하는 자금줄 역할을 맡는다.
벤처 업계에서는 내년 업황도 녹록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최근 벤처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벤처 기업 455개사 중 내년 자금사정이 올해 대비 나아질 것이라고 전망한 응답 비중이 20.9%에 그쳤다. 악화할 것이란 비중이 47.7%로 훨씬 높았다. 한상우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의장은 “내년에도 벤처 시장의 분위기는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위기 극복을 위해 수익성 개선에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