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메리야스 그놈, 아직도 눈앞에"…5·18 성폭력, 국가책임 묻는다

2025-11-06

아직도 생각나. 난 하얀 요에 누워있고… 하얀 메리야스를 입은 그놈이 내려다보고 있어. 그 장면이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날 괴롭히는 거야. 이젠 끝을 보고 싶어.

김선옥(67)씨는 ‘5·18 성폭력 피해 최초 증언자’다. 김씨는 1980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사실을 2018년 처음 세상에 알렸다. 이로 인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을 조사하는 공동조사단이 꾸려졌고, 추가적인 피해 사례가 알려지는 등 파장이 일었다. 그리고 오는 7일, 김씨 등 5·18 성폭력 피해자 및 가족 17인이 주도한 국가 대상의 첫 손해배상청구소송 변론공판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다. 피해가 발생한 해로부터 45년 만이다. 김씨는 재판을 앞둔 5일 중앙일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빨갱이 새끼” 강압 취조 후에 당한 일

김씨는 “아직도 그 일을 말할 때면 온몸이 아프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음악교육과에 재학 중이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광주mbc 건물이 불타는 걸 목격한 김씨는 1980년 5월 22일, 계엄군이 외곽으로 빠져나간 새를 틈타 전남도청으로 갔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맡은 그는 상황실에서 출입증과 야간통행증 등을 발급하고 안내방송을 했다. 외신 기자에 통행증을 발급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엿새째인 27일 새벽, 김씨는 계엄군의 무력진압 직전 도청을 운 좋게 빠져나왔다.

그러던 7월 3일, 중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고 있던 김씨의 교실에 계엄사령부 수사관이 들이닥쳤다. 그날로부터 두 달간 악몽이 시작됐다. 옛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연행된 김씨는 갖은 폭행과 모욕을 당했다. 김씨는 “(수사관들이) ‘여자 대빵’을 잡아왔다고 자랑스러워했다”며 “‘넌 이제 살아서는 감옥에서 못나와 이년아. 무기징역이야. 빨갱이 새끼’라고 인격을 짓밟았다”고 했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김씨의 집에서 불온서적도, 학생 운동을 하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수사가 끝날 무렵인 9월 4일, 계장이라 불리던 한 수사관은 김씨를 영창 밖으로 데리고 나가 비빔밥을 사줬다. 그리고 말없이 그를 인근 여관으로 끌고 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하늘이 유난히 파랬고 초록빛 벼가 바람에 나부끼는 날이었다.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저항이란 불가능했다. 다음날 기소유예로 석방된 후 학교에서도, 나중에 구한 직장에서도 사람들은 김씨를 피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교육청의 압력에 못 이겨 학교를 그만두고 술로 세월을 보냈고, 어머니도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떴다. 평범한 음악인을 꿈꾸던 그의 삶은 그렇게 무너졌다.

“여태 살아있는 건 매듭지으란 신의 뜻”

그로부터 38년 후 담아뒀던 피해 사실을 공론화했지만 김씨의 건강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2001년 앓았던 유방암이 재발하면서 몸 곳곳에 전이됐고, 지난해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고 김씨는 살아야 할 이유를 더욱 뚜렷하게 느꼈다. 지난해 12월 12일 5·18 성폭력 피해자 모임 ‘열매’ 사람들과 손배소를 청구한 이유도 그래서다. 그는 “그 일이 있고 나선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고 했었고, 암도 두 번 겪었지만 여태 살아있다”며 “마치 5·18 성폭력 문제를 결론지으란 신의 뜻인 것 같았다”고 했다. 과거사를 책임지는 국가의 자세를 보고 싶다는 의미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2023년 12월 성폭력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16건에 대해 진상규명하란 결정을 내렸지만, 막상 밝혀지는 것이 없어 허망한 심정이었다고도 전했다. 김씨는 “이젠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 상처를 주도적으로 마주하고 싶어졌다”며 “‘5·18 그 자체’인 내가 이 일에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나”며 책임감을 드러냈다. “피해자들의 잃어버린 45년을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한다”며 “우리 대에서 끝나야 후손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지난한 싸움일 거란 예감도 들었다. 하지만 김씨는 어떻게든 재판이 끝날 때까지 버티겠다고 했다. “이제 한번만 더 암이 찾아오면 난 더 살지 못하겠지. 그래서 기도 중이야. 내 미투가 쏘아올린 공이 어떤 결말을 내는지 보고싶다고, 나 그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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