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회가 준 건 경력 아닌 트라우마"
"의지는 있지만, 일할 만한 환경이 없다"
[서울=뉴스핌] 조승진 기자 = 2년간 한 대학교 행정실에서 일했던 박지수(가명·34세)씨는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한동안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상사가 실수로 연락하는 건 아닐까', '또 무슨 일을 시키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계속됐고 퇴사 후에도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 졸업 후 처음 발을 들인 사회...그곳에서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일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살이 6kg이나 빠졌어요"
24일 본지 기자와 인터뷰에서 박씨는 이같이 말했다. 박씨는 첫 직장에서 겪은 일 때문에 불안장애, 우울, 깊은 무력감을 얻었고 수차례 심리 상담과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받아야 했다.

박씨가 담당했던 업무는 학과 운영자금, 학사 일정, 학생 상담 등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사를 대신해 지인의 결혼식장에 가야했고 개인 은행 업무도 대신 봐줘야 했다. 하지만 박씨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상사의 횡령 과정에 이용됐다는 사실이다.
박씨는 "상사는 회의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자주 가는 가게 영수증을 가짜로 끊어오라고 시켰다"며 "마치 정말 그 식당에서 회의한 것처럼 증빙을 꾸며 학교에서 지원금을 타는 방식이었다"고 했다.
현금을 받으면 박씨는 상사의 개인 통장으로 돈을 입금해야 했다. 상사는 "훗날 쓰겠다"고 했지만 그대로 명예퇴직했다. 박씨는 "문제가 있다고 느꼈지만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항의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폭언과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루는 상사가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박씨의 팔을 세게 때렸다. "야 인마, 이 새X야" 등의 폭언도 퍼부었다. 최대한 버텨 경력을 쌓으려고 했던 박씨는 그 순간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박씨는 "일을 하며 하나의 인격이 아닌 도구가 되는 듯한 무력감을 크게 느꼈다"고 말했다.
일을 그만둔 후에도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상사가 아닐지 늘 신경이 곤두섰다. 홀가분한 마음보다는 이겨내지 못했다는 실패감도 들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자기도 했다.
박씨는 "일을 그만두고 헌혈하러 갔는데 심박수가 너무 높아 피를 뽑을 수 없다고 하더라"며 "늘 긴장 상태에 있던 탓"이라고 말했다.

◆ 정규직 약속도 뒤집고 병가 쓰면 불이익…"회사에 정떨어져"
서경미(가명·31세)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작년 11월 중견기업 마케팅팀을 떠났다. 3년 반을 버텼지만 결국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해당 직군에서 일할 생각을 접었다.
회사에 대한 믿음이 깨진 것은 계약 조건에서부터였다. 서씨는 처음 회사의 근무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하던 중 조건이 더 좋은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다. 하지만 경력 채용 당시 회사에서 1년 후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고 입사했지만 회사는 서씨가 근무한 지 1년이 다 돼갈 무렵 이 말을 번복하며 2년을 채워야 한다고 통보했다.
서씨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법적인 문제가 없다"며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부서 내 병가 신청을 한 직원에 대한 노골적인 불이익을 목격하면서 서씨는 회사에 대한 신뢰가 빠르게 식었다.
서씨는 "상급자가 병가 신청을 한 직원에게 불이익을 줄 만한 자료를 팀원들에게 모아오라고 지시했다"며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근거를 가져오라며 닦달하는 모습에 오만 정이 떨어졌다"고 털어놓았다.
근무 환경도 가혹했다. 저녁 휴식 시간을 챙기려고 하면 도태되는 분위기가 팽배해 새벽 출근, 한밤중 퇴근이 이어졌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수직적인 조직 문화와 조직원을 배려하지 않는 상급자의 행태 역시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성과에 대한 압박 역시 심해 서씨는 불안장애까지 얻었다.
서씨는 "출근하는 순간부터 퇴근까지 계속 불안했고 자기 전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며 "일에서 의미와 행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서씨는 당시 자신이 했던 업무를 생각하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 "일하고 싶다, 하지만 그 환경이 문제"
박씨와 서씨 모두 일하는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업무 환경이 문제였다고 입을 모았다.
박씨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직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기력한 노동자의 모습, 초과노동, 최저 시급 등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앞선다"며 "요즘 청년들이 '나'라는 존재를 찾고자 하는 것과 달리 회사는 보수적인 소속감만 강요하지 않냐"고 했다.
이어 "돈을 버는 생계 행위도 중요하지만 요즘 청년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며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고 감정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합리적인 조직 분위기가 있는 곳에서라면 다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씨는 "서울에서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급여 수준, 야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 않는 근무 환경을 원한다고 하면 눈이 높다고 한다"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눈이 높다'고 표현하면 당연히 일자리와 구직자 간 미스매치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일 외에서 추구할 수 있게 워라밸이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냐"며 "노동과 휴식이 명확히 구분되는 근무 환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의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20·30대 '쉬었음' 인구는 73만5000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3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로 같은 분기 기준 최대 규모다.
chogiza@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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