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당선되자 청와대 일반 공개
대중의 호기심거리 전락시켜
집무실 용산 미군기지 옆 이전
정보 전쟁시대, 보안 취약 노출
2025년 4월4일 대통령이 탄핵당하였다. 2024년 12월3일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지 꼭 넉 달 만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즉시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관저를 한남동으로 옮겼다. 유령의 집이라도 되는 양, 그는 단 하루라도 청와대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청와대를 거쳐 간 역대 대통령 대다수가 뒤끝이 안 좋아서 옮긴다는 말부터 이른바 ‘도사’나 ‘법사’가 대통령실 이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소문까지 무성했다. 이후 경찰 수사로 대통령 관사 이전에 풍수지리 전문가가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지금이 조선 시대냐’고 비판했지만 사실은 조선 시대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도읍을 정하고 궁궐터를 정하는 데에는 나름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조선 초기 도읍을 새로 정할 때 처음에 ‘신도안’이라 하여 계룡산 부근으로 정했다가 한양으로 바꾼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강처럼 물길이 원활하지 않아 세곡선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곡을 거둘 수 없으면 나라를 운영할 수 없었다. 풍수지리는 단지 하나의 ‘참고 사항’에 불과했다.
두 차례 왕자의 난 끝에 왕위에 오른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 경복궁을 버려두고 창덕궁만 사용하자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으뜸 궁궐인 경복궁으로 임금의 거처를 옮길 것을 주장했다. 이에 태종은 “내가 어찌 경복궁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서 쓰지 않는 것인가? 내가 태조께서 처음으로 창설하신 뜻을 알고, 또 지리의 설(說)이 괴상하고 헛된 것임을 알지만, 술자(術者: 천문, 역산, 풍수와 지리 등을 전문으로 보는 사람)가 말하기를 ‘경복궁은 음양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의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 무인년 규문의 일은 내가 경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이 경복궁에 가지 않은 것은 ‘무인년 규문의 일’, 즉 태조 7년에 자신이 주동하여 경복궁에서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을 죽인 일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에 앞서 태종은 경복궁의 풍수를 언급하면서 기본적으로 ‘지리의 설은 괴상하고 헛된 것’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당시에도 풍수와 지리는 공식적으로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곧바로 청와대를 개방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이며 거처이자 국가 안보와 주요 정책의 심장부였던 청와대는 마치 적장의 ‘아지트’였던 양 까발려지고 뭇 대중이 기웃거리는 호기심거리로 전락했다. 어제까지 전직 대통령이 사용하였던 사무실은 물론 잠자리의 온기가 남아 있는 침실까지 한낱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는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황제처럼 청와대가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만천하에 내보이며 자랑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도 왕도 아니었다. 당내 경선 중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써 다니던 그가 계엄을 통해 왕이 되기를 바랐는지 모르지만, 그는 단 한 번 5년 임기가 정해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5년 동안 대한민국을 위해 일해야 하는 나라의 ‘큰 머슴’이었다.
청와대가 급작스럽게 개방되던 이 광경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 뒤 조선 궁궐을 개방하고 훼손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일본은 곧바로 1910년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경복궁의 전각 대부분을 공매하고 곧이어 그들의 치적을 자랑하는 박람회를 비롯해 여러 행사를 경복궁에서 개최했다. 이를 두고 일본은 “구태는 일변하였다”고 선전했다.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으로 꾸미고 ‘창경원’으로 이름마저 바꾸어 일반인에게 개방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창덕궁과 경희궁, 덕수궁도 이런저런 명분을 달아 전각을 철거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시설물을 설치함에 망설임이 없었다. 조선이 망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한국인에게 궁궐은 여전히 약간의 경외감이 묻어 있는 곳임을 생각하면 당시 사람들은 엄청난 모욕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시대를 떠나 한 나라 최고 권력자의 집무실과 거처는 국가 안위와 직결되기에 보안이 각별하다. 왕조 시대의 왕이든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든 최고 권력자는 백성이나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자리라 왕이나 대통령의 안위는 곧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왕의 거처는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불렸다. 왕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의 위계질서에서 왕의 거처는 궁궐에서 가장 엄중한 공간이었다. 효종 때 영돈령부사 김육은 궁궐 전각의 위치를 논하는 상소문에서 “대개 제왕의 거처는 깊숙하게 하려고 아홉 겹으로 안을 장엄하게 하고 빙 둘러 건물을 밖에 나열합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홉’은 숫자 중 가장 큰 숫자라 겹겹이 둘러싸는 왕의 거처를 강조하기 위한 은유적인 상징이다.
이러한 성격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조선 시대보다 지금이 더 엄중할 수 있다. 현대는 ‘정보 전쟁’의 시대다. 비록 우방이라 하더라도 ‘정보 전쟁’에는 예외가 없다. 2013년, 미국이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각국 우방국 대사관을 도청해 왔다는 폭로가 있어 큰 파문이 일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와대를 두고 미군 부대 바로 옆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긴 것은 경솔하기 그지없다. 미국이 주동이 되어 경제 패권을 두고 피아 구분 없이 ‘관세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심상치가 않다.
곧 들어설 새 정부에서는 ‘괴상하고 헛된 지리의 설’이나 ‘도사’나 ‘법사’의 말보다 무엇이 합리적이고 실질적인지를 따져야 한다. 공간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사고를 지배한다. 이 시대에 맞는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공간은 이 시대에 맞는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의 산실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일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중요한 이유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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