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부터 연극 공동창작 양손프로젝트
작품선정부터 연출까지, 제작 전 과정 함께
“빠르고 효율적인 게 창작에 좋지만은 않아”
명동예술극장에서 ‘파랑새’ ‘전락’ 공연
공동창작은 말이 쉽지 실제로 쉬운 일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언급해 다시 유명해진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을 떠올려보자. 여러 사람이 의견을 모으다 결정이 한없이 미뤄지거나 감정이 상한 경험은 또 어떤가.
양손프로젝트는 2011년부터 4인 체제로 공동창작을 해온 연극 집단이다. 배우 손상규(48)·양종욱(46)·양조아(42)와 연출 박지혜(40)로 구성됐다. 이 집단에서 배우와 연출의 구분은 임의적이다. 4명은 작품 선정, 각색, 연기, 연출 등 연극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의견을 나눈다. 카리스마 있는 연출이 지시하면, 배우와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이행하는 전통적인 연극판의 모습은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이라는 배경으로 뭉쳤지만, 선후배 위계도 없다.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서울 성북구 한 연습실에서 만난 이들에게 물었다.
“빠르고 효율적인 게 창작에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작업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힘이 있거든요.”(양종욱)
“‘무언가 결정한다’는 생각보다는, 각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끄집어내는 과정이라고 봐요. 처음엔 생각이 부딪히다가도 나중엔 바뀝니다. 설득했을 때의 쾌감, 설득당했을 때의 쾌감이 있어요. 우리의 모든 결정은 잠정적입니다. 연극 도중에도 바뀔 수 있습니다.”(박지혜)
작품 선정부터 연극이 시작된다. 사실 이 과정이 가장 오래 걸린다. 예를 들어 소설을 연극화하는 기획전에 참여하기로 했다면, 4명이 각자 좋아하는 소설을 들고 온다. 혼자 읽었을 때는 좋았는데 함께 읽어보니 도무지 연극의 ‘그림’이 안 나오는 작품이 있다. 나는 마음에 드는데 누군가는 절대 반대하는 작품도 있다. 회의실에 모여 두서없이 아무 말이나 던지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한다. 박지혜는 “신작 기회가 와서 얘기하다 보면 우리 안에 쌓여있던 것 중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이 나온다. 서로 이견을 좁히다가 결국 모두의 욕망이 모이는 지점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말로만 하는 회의가 아니다. 어떤 대목에선 즉석에서 연기하고, 연출 아이디어도 낸다. 손상규는 “진흙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무너뜨리고 다시 만드는 것 같다”고 비유했다.
15년 가까이 하다 보니 이런 작업에 익숙해졌다. 손상규는 “서로 캐릭터를 알게 돼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주고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종욱은 “각각의 관점이 있고, 상대가 어떤 관점을 채워줄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양조아는 “각자 의견이 강하지만 아집은 없다. 일단 설득되면 수용도 빠르다”고 말했다. 이들은 뒤풀이도 거의 하지 않는다. 온종일 회의하며 의견을 나눴으니, 못다 한 이야기를 할 뒤풀이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양손프로젝트는 2월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작품 2편을 잇달아 올린다. 모리스 메테를링크 원작의 <파랑새>(8~10일, 15·16일)와 알베르 카뮈 원작의 <전락>(13~15일)이다. 민간극단 우수작의 레퍼토리화를 돕는 국립극단의 ‘기획초청 Pick크닉’의 일환이다. <파랑새>는 양종욱과 양조아가 각각 틸틸과 미틸을 연기하는 2인극, <전락>은 손상규의 1인극이다.
<파랑새>와 <전락>처럼 이들은 소설의 연극화에 역량을 발휘해왔다. 다자이 오사무, 김동인, 현진건, 모파상 등 유명 작가의 소설을 무대화해 호평을 받았다. 양종욱은 “희곡에는 대략적인 설계도가 그려져 있지만, 읽기 위해 쓰인 소설은 무대를 위한 순수한 재료다. 그만큼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몇 명이 연기할지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많은 논의가 이어지고, 배우들에게도 그만큼 많은 역할이 요구된다. 희곡을 무대에 올릴 때 배우는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지만, 소설을 올릴 때 배우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일 수도, 역할을 연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박지혜는 “다양한 층위가 섞이면서 배우와 관객 모두 특별한 경험을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특성 때문인지 무대도 단출하다. <파랑새>에는 의자, <전락>에는 사다리만 나온다. 요즘 많은 연극에서 활용하는 영상 혹은 가변 세트는 없다. 손상규는 “풍경을 그릴 때 하늘은 안 그리고 산만 그린다. 사실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에센스만 내놓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선명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박지혜는 “배우의 힘으로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나 시도하는 것이 재밌고 연극적이다. 다른 걸 제시하는 건 불필요하고 오히려 방해된다”고 말했다.
손상규는 지난해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연극 <타인의 삶>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다들 개인 활동으로도 바쁘지만, 올해는 양손프로젝트 작품도 이어진다. 3월에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을 극장 아닌 공간에서 낭독하는 프로젝트,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의 민주화운동기념관 개관 관련 프로젝트,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올릴 신작인 입센의 <유령>도 계획하고 있다.
연극인에게 ‘왜 연극을 하나’라고 묻는 건 너무 직접적이고 투박한 질문일 수 있다. 사람에게 ‘왜 사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손프로젝트 멤버들은 공들인 답변을 했다.
양조아 “전 일상에서 굉장히 삐거덕거리는 사람인데, 연기할 때는 일상에서 안 하는 것들을 한 달 반, 두 달 훈련해서 무대에 매끄럽게 펼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게 제게 안정감을 크게 준 것 같아요. 요즘 어린 조카를 보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연극 놀이’를 하더라고요. 갑자기 저한테 ‘형님, 저 어디 좀 데려다주세요’ 하는 식으로. 이게 더 큰 사회로 나가기 전에 놀이로 학습하는 거 같아요. 저한테도 연극이 삶과 자연의 이치를 깨우치게 하고, 존재 가치를 어떤 방향으로 잡아야 할지 고민하게 하고,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있게 하는 환경인 거 같아요.”
양종욱 “공연을 보러 가면, 저쪽 객석에 앉은 사람과 내가 보는 것이 정말 다를 거 같잖아요. ‘나는 재미 없는데 저 사람은 왜 웃지?’ ‘나는 재밌는데 저 사람 표정은 왜 그러지’ 하면서 관객 구경을 많이 해요. 전 이게 너무 신기해요. 다 같이 모여있는데 각자 다른 경험을 하는 것. 그게 어떤 경험인지 아는 건 요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게 멋진 일들이 일어나는 곳. 그곳이 극장입니다.”
박지혜 “쉽고 간결하게 말하자면 연극은 제 삶에서 가장 큰 쾌(快)를 주는 일입니다. 전 머릿속에서 상상의 세계를 펼치는 걸 좋아합니다. 공연은 사실 다 가짜잖아요. 배우들이 이 모든 가짜를 연기하고 실재하지 않는 걸 실재한다고 믿게 하는데, 이게 믿어지는 게 너무 놀라워요. 제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정말 행복해해요. 전 여전히 아이처럼 그 가짜 이야기를 믿고 듣는 걸 제일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그게 연극의 원초적인 유희성 아닐까 해요. 내 신체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과도 관련 있는 거 같고요.”
손상규 “저도 연극하는 게 제일 재밌어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걸 어떻게 만들어갈까 머리가 막 회전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게 잘 풀리든 안 풀리든 재미있어요. 또 하나는,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와 진짜 만날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누군가의 눈을 보고 얘기하는 거요. 오히려 무대 위에서 상대 배우와 혹은 작업하면서 그런 일이 많아요. 그런 과정에서 제가 좀 더 온전해지는 거 같아요. 그러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좋은 걸 준다고 할까요. 전 이 일이 인류에게 무척 가치 있는 일이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