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
본 자료는 양호(兩湖) 순무(巡撫)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제2차 동학농민혁명 진압 과정에서 1894년 10월 11일부터 1895년 2월 5일까지 각처와 주고받은 공문들을 수록한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정부의 진압 관련 사항을 알 수 있는 핵심 자료로 순무영 보고와 답변, 각 지역 지방관과 주고받은 문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과 친군 경리청 부영관 성하영 등이 선봉장에게 보고한 문서와 그에 대한 지령 등 다양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 이후 그 진압을 위한 부대로 조선 정부는 양호 도순무영을 편제하였는데 여기에는 기존 통위영·장위영·경리청과 일본군에게 훈련받은 교도중대가 소속되었다. 양호 도순무영은 신정희를 양호 도순무사, 좌선봉 이규태, 우선봉 이두황 등을 주요 지휘관으로 2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당시 이규태는 친군 장위영 정영관이었는데 정부에서 그를 양호 도순무영 별군관 겸 순무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농민군 진압에 종사케 하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 일본군은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지휘하는 후비 보병 제19대대 등으로 동학당 정토군을 편성하여 각 지역의 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하면서 이규태 부대는 일본군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순무 선봉장 이규태는 교도대와 통위영 각 부대를 이끌고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여 과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뒤 진위로 갔다. 도중 과천에서는 좌수 등에게 해당 경내에 동학농민군들을 혹시라도 숨기고 발설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드러나면 군령으로 처벌받겠다는 다짐을 받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 토포사 이두황 부대가 청주성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두황 부대의 본진은 경리청·진남영 부대와 합세하여 보은 장내리에 있는 농민군을 향해 가면서 접주 백학길을 효수하였다. 장내리로 들어가서는 온 마을을 수사하고 농민군 주도자를 처단한 뒤 임시 막사와 집들을 다 태워버렸다. 10월 15일 순무영에서 선봉장에게 전령을 보내 공주의 비도(匪徒)들이 몹시 방자하게 날뛰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하니 지원을 늦출 수 없다면서 즉시 전진해 섬멸토록 하고 사정을 보고토록 하였다. 이 무렵 광주에 있던 손화중이 흥덕·고부·무장·정읍·고창 등지에서 농민군을 동원하여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과 합세하여 나주 동북 방향에 진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규태 부대는 일본군 부대와 함께 행군하여 진위와 성환을 거쳐 20일 천안에 도착하였다. 진위에서는 현령이 거리에 방문을 붙여 선봉진 부대의 도착 사실을 알리고 농민군들은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거괴를 붙잡아 들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병사를 나누어 보내 토벌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향약절목(鄕約節目)을 작성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주민들을 철저히 단속하였다. 이규태는 천안의 거리 곳곳에 국한문 공고문을 게시하여 동학도들을 경계하고 유언비어를 만들고 평민들을 선동한 자들은 민회소와 창의소에서 잡아들여 처단할 것을 강조하였다. 천안의 유생들도 이규태에게 특별히 군대를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다. 천안에서는 농민군이 공주·유성·대전 등지와 청주의 관군이 패전한 곳에 수천 명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위영 영관에게 공문을 보내 전진토록 하였다. 이규태는 이두황에게 연기에서 농민군이 출몰함으로 옮겨 주둔하여 이들을 막고 전라도 농민군이 지나가는 후환을 끊으라고 지령을 내렸다.

〈순무선봉진등록〉은 공주공방전과 이후 전라도 지방에서의 동학농민군 진압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봉준은 논산 일대에 다시 결집한 농민군 2만여 명을 규합하여 노성과 경천으로 가서 일본군 및 관군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11월 8일 농민군은 이인을 향해 공격해 왔고 다른 한 부대는 판치와 효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9일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하루 종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패배하였다. 11~12일 경에는 능치 등 공주 부근 산봉우리에 남아있던 농민군마저 관군에게 쫓겨 계룡산 등지로 후퇴함으로써 20여 일에 걸친 공주공방전은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은 전주를 거쳐 11월 25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하게 된다. 당시 순무 선봉진에서는 원평으로 간 농민군이 3천여 명, 그곳에 집결해 있는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금치 전투 이후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과의 각종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였다. 이후 순무 선봉진 산하 각 부대는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의 지시를 받아 각처로 피신하여 항쟁을 지속하던 농민군들을 수색 체포하여 일본 군영으로 압송하였다. 전의현감은 기찰포교와 별초군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성묘를 계기로 체포 계책을 세워 그 우두머리 25명을 체포하여 문초한 바 있다. 옥과현에서는 양호 소모관 부대와 150여 명의 일본군이 전재석 등 농민군 참여자들을 때려죽이기도 하였다. 곡성현에서도 중앙군과 일본군이 사로잡은 우두머리를 매질하여 살해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개남은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2월 1일 태인 산내면에서 강화 병정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광주를 다시 점령한 손화중은 12월 1일 휘하의 농민군을 해산하고 떠났고, 교졸에게 체포된 주윤철 등 동학 접주 다섯 명은 곤장을 맞고 사망하였다. 최경선은 귀화한다는 방문을 내걸고 광주를 떠나 남평을 거쳐 동복으로 갔는데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순창에 수감되어 있다가 7일에 일본군 진영에 인도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

12월 2일 밤에는 순창 피로리에서 전봉준이 민보군 한신현 등에게 체포 수감되어 있다가 7일 최경선과 함께 일본군에게 인도되어 초토영이 설치되어 있던 나주로 압송되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미나미 고시로가 농민군 우두머리의 인도를 요구하는 이유로 “동학의 비당(匪黨)을 조사하는 일은 귀국의 반역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관계된 것이 적지 않습니다. 무릇 비적 괴수를 붙잡으면 서울로 속히 압송하여 죄상을 국문하여 형법대로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전보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일본의 조선 정책에 큰 장애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호남 농민군 주력이 완전히 진압되자 이듬해인 1895년 1월 11일 군무아문은 순무영을 철폐하고 여러 곳에 파견한 참모관·참모사·소모사·소모관·별군관 등을 모두 혁파하고 선봉진도 원대로 복귀하라는 공문을 하달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은 2월 5일 계엄 태세 발령을 해제한다는 군무아문 전령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호순무선봉장 이공(李公) 묘비명〉
양호 도순무영 순무 선봉장 이규태(李圭泰 : 1841~1895)의 묘비명이다. 경주를 본관으로 누대 무과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이규태는 1894년 차례로 훈련도정·총어영 별장·장위영 정령관 등에 임명되었다가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양호 도순무영 선봉장으로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지휘하였다. 그는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목천 세성산으로 보내 동학농민군을 토벌케 하였고, 경리청 영관 홍운섭 등에게는 공주 농민군 토벌을 지시하였다. 이후에는 퇴각하는 농민군을 강진과 해남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나 당시 개화당 정부의 동학농민군 진압의 기본방침은 일본군의 무력과 그들의 지휘를 받아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었기 때문에 최종 지휘는 일본군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후비 보병 제19대대 대대장 육군 소좌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조선군 일선 최고 수뇌부인 좌우 선봉장 등을 ‘휘하’에 두고 지령을 내리는 사실상 농민군 진압을 위한 조⋅일 연합군 지휘관 중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일본군 지휘에 거부감을 가진 이규태는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이규태는 동학농민군이 완전히 진압된 직후인 1895년 6월 54세로 서울에서 사망하여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선유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 묘비명은 〈일성록(日省錄)〉 편집관 이승욱이 1915년에 쓴 것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39) 선봉진서목과 상순무사서,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38)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관지책(官旨冊)·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鎭安縣各樣上納月當錢木數爻納未納成冊) (37) 〈춘당록(春塘錄)〉, 〈의산유고(義山遺稿)〉 (36) <시문기>와 <기문록>- 충청지역 유생이 바라본 동학농민혁명 (35) 우금치 전투 이후 지방통제의 실상을 보여준 북하면보 (34) 〈남정일기(南征日記)〉, 〈갑오실기(甲午實記)〉 (33) 1894년 이후 중범죄의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정배안〉 〈중범공초〉에 실린 관료층과 민중에 대한 차별 (32) 경상도 상주와 김산소모영의 동학농민군 진압 자료인 〈소모사실〉 (31) 〈이복영일기(李復榮日記)〉, 〈남유수록(南遊隨錄)〉과 이용규(李容珪)의 〈약사(若史)〉 (30) 염기(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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