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혹한, 중노동…셀레트칸과 오렌부르크의 노예

2024-10-03

기획취재: 잊힌 현대사, 시베리아 억류의 기억과 기록

1. 강제동원 피해자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들

2. “교사도 징병” 관동군에 끌려간 울산 사람 이규철

3. 철모도 소총도 없이 전쟁터로, 전차 격파 자폭 훈련

4. 기아, 혹한, 중노동…셀레트칸과 오렌부르크의 노예

5. 험악한 귀향길, 시베리아 억류자 피해보상과 과제

6. 러시아 공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한문해

“시커먼 연기를 뿜으면서 버티고 있는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 우리는 고삐에 매달려, 채찍에 못 이겨 끌려가는 소처럼 화물열차에 올랐다. 화차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많이 타고 보니 눕기는 고사하고 다리를 펼 수 없었다. 마치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화차 출입문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또 달린다. 이 화차 안에서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먹지 못하고 공포와 수심에 찬 포로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28쪽)

[울산저널]이종호 기자= 1945년 9월 4일 헤이허(黑河)에서 헤이룽강(黑龙江, 아무르강)을 건너 블라고베셴스크에 대기하고 있던 화물열차를 타고 사흘 만에 포로들이 도착한 곳은 아무르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 셀레트칸이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스보보드니보다 더 북쪽, 시베리아 깊숙이 틀어박힌, 인가를 찾아보기 힘든 벽촌이었다.

포로들은 이곳 집단농장에서 9월 말까지 감자를 캤다. ‘노르마’(작업 할당량)를 달성하지 못하면 쉴 수 없었다. 종일 끝도 없이 펼쳐진 감자밭에서 감자를 파냈지만 저녁에 구운 감자 두 개씩 배급받는 게 식사의 전부였다. 해가 지면 농장에 천막을 치고 담요도 없이 풀 위에 누워 허기와 추위를 견뎌야 했다.

10월부터는 집단농장에서 두 시간가량 걸어 이중 철조망을 친 4만㎡ 울타리 안에 수용됐다. 동서남북 사방에 설치한 망루에서 소련군 보초들이 포로를 감시했다. 일본군 포로들은 그곳에 기거용 천막을 치고 벌목 작업에 동원됐다. 얼마 뒤 킷타(橘田)대와 호라우치(堀内)대도 이곳에 끌려 왔다.

포로들은 매일 새벽 분대별로 천막 앞에 정렬해 궁성요배를 하고 군인칙유를 제창했다. 반합에 3인분 국을 받아 흑빵(흘렙) 한 조각씩 먹고는 작업 출발 점호를 받고 2인 1조로 숲속에 들어갔다. 톱과 도끼로 낙엽송을 잘랐는데 벌목 노르마는 1조당 2m×5m×1.5m=15㎥였다. 흑빵 한 조각을 먹고 두 명이 해내기에는 힘든 작업이었다.

처음 겪는 시베리아의 혹한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천막 속 지면 온도는 영하를 밑돌았다. 일본인 포로들은 모포와 외투를 깔고 잘 수 있었지만 여름 군복 차림의 조선인 포로들은 맨바닥에 누울 수 없었다. 벌목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 죽은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매고 와서 천막 속에 불을 피웠다. 담요도 외투도 없는 조선인 포로들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서로 몸을 맞대고 잤다. 지하 막사가 만들어질 때까지 80일 넘게 누워서 자지 못했다.

포로들은 시베리아의 한겨울이 닥치기 전에 천막 대신 땅을 파고 지하 막사를 지었다. 길이 약 100미터, 폭 6미터, 깊이 4미터로 땅을 파고 자작나무로 기둥을 세워 지붕을 이었다. 북쪽에 3층, 남쪽에 2층의 침상을 만들고 포대에 낙엽을 채워 침상 위에 깔았다. 입구와 안쪽에는 난로(페치카)를 설치했다. 지하 수용소 중앙 50미터 지점에 아베대와 킷타대의 출입문도 달았다.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 문제 연구>(2018)를 쓴 김수용은 “일부는 기존에 운영하던 정치범 등을 수용했던 교정노동수용소를 이용하기도 했고, 대부분은 ‘젬랸카’라 불리는 토굴이나 판자로 만든 가건물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며 “때문에 포로들은 자신들이 지낼 수용소를 직접 건설해야만 했다”고 했다.

조선인 포로들은 신병이라는 이유로 밤에 한 시간씩 교대로 난로 당번을 맡았다.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짐작으로 교대해야 했다. 군대 규율은 포로 생활 중에도 엄연히 남아 있었다. 조선인 신병이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주운 감자를 난로 당번이 됐을 때 구워 먹으려고 불에 넣어둔 것이 일본인 병장에게 발각돼 심하게 구타당한 일도 있었다. 천막생활을 할 때는 일본인 포로들이 천막 안에서 빵을 나눈 다음 천막 밖에 있는 조선인 포로들에게 배급했다. 조선인 신병들에게 지급된 빵은 정량보다 적었다. 지하 막사로 들어가서야 빵 분배는 공평해졌다.

지하 막사를 밝힐 등잔불은 생선 기름을 이용했다. 이 때문에 3층 침상은 얼굴이 그을릴 정도로 공기가 탁했다. 막사 안 위아래 온도 차이도 심했다. 1층 침상이 추위를 겨우 면할 정도였다면 3층은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이 때문에 포로들이 감기에 쉽게 걸렸고, 영양실조와 비위생적인 환경은 질병을 확산시켰다. 의약품이나 의료시설이 부족해 많은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

추워서 옷을 입은 채 자야 했고 속옷 빨래를 하지 못하니 이가 극성이었다. 이규철은 내의를 들고 밖으로 나가 비로 훑으면 흡사 밀가루 위에 깨를 뿌린 것처럼 눈 위로 이가 떨어졌다고 수기에 적었다. 가로세로 3미터, 높이 1.5미터로 땅을 파고 아궁이와 굴뚝을 설치한 다음 포로들의 옷을 걸어두고 불을 지폈다 꺼내는 작업을 두 차례 하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흡혈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한겨울 몇 달 만에 하는 목욕은 또 다른 고역이었다. 어두운 산길을 따라 6킬로미터 떨어진 천막 목욕장에 끌려가 기진맥진한 몸으로 추위에 떨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도 고통이었고, 뜨거운 물 한 통을 받아 몸에 끼얹고 나서 전원이 목욕을 마칠 때까지 밖에서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고 손가락 발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기다리는 것도 힘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수용소로 돌아와서 빵 한 조각과 서늘한 수프를 마시고는 침상에 드러누웠다. 이튿날 동이 트기 전에 또 벌목장으로 몰아내는데 마소보다도 못한 포로 신세를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 올릴 때 끌려간 백성들도 이렇게 혹사당했을까. 지옥의 노예들도 이렇게 비참했을까.”(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39쪽)

시베리아 일본군 포로 60여만 명

이 중 10%인 6만여 명 사망 추정

조선인 포로 사망자는 70명 안팎

지하 막사에서 1945년 12월 한 달 동안 아베 부대원 30여 명이 죽었다. 이규철은 이때 조선인 포로 현득영, 남00, 김재관 등 세 명의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일본 정부에 준 약 4만 명의 시베리아 포로 사망자 명부와 이규철이 1991년 11월 MBC 취재진과 함께 모스크바 공문서보관소를 방문해 받은 자료에는 이들 세 명의 이름이 없다. 이규철은 셀레트칸 사망자 세 명과 오렌부르크 수용소에서 1948년 사망한 김현균, 玉川00 등 두 명을 추가해 모두 67명의 조선인 사망자 명부를 수기에 기록했다.

1991년 이후 소련과 몽골 정부 등으로부터 전해진 시베리아 억류 사망자 명단은 4만6000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조선인 사망자는 70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강동위)가 2011년 펴낸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 문제 진상조사>에서는 1991년 <월간 아사히> 7월호에 실린 3만9985명의 사망자 명부(아사히 명부)에 조선인은 61명으로 기록돼 있지만 이규철의 추가 명단과 1991년 이후로 6000명 이상의 사망자 명부가 입수됐기 때문에 조선인 사망자가 더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론했다.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 문제 연구>(2018)에 따르면 시베리아 일본군 포로 60여만 명 중 사망자는 10%인 6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사망자 중 80%는 포로 수용 준비가 미진했던 첫해 겨울에 집중돼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조선인 사망 포로의 수는 60~70명 안팎으로 상대적으로 일본인 포로보다 젊은 조선인 포로들의 사망률이 낮았다.

2009년 2월 일본 외무성에서 팀장급 한‧일 유골 협상이 열렸다. 당시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원호국 원호기획과에서 시베리아 부랴트공화국에 있는 세 곳의 매장지에 묻힌 12명의 조선인 억류 사망자 자료를 전달했다. 강동위는 “일본 정부가 조선인 사망자 명부를 별도로 관리하고 있고, 매장지 상세 정보 또한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 조선인 사망자 추가 명단과 상세 매장지 정보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우리 정부 스스로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조사와 유골 봉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지금이라도 희생자들의 상세 매장지를 확인하고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해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강동위는 2007년 <강제동원 구술기록집7,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의 기억1>과 2011년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 문제 진상조사> 자료집을 펴내고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512명을 확인한 것 말고는 더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2016년 해산했다.

셀레트칸에서 오렌부르크로

조선인 포로 독립부대 편성

1946년 5월 7일 이규철과 포로들은 셀레트칸 수용소를 나와 포로 수송 열차에 실려 이송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20일 동안 달려 도착한 곳은 우랄강 상류 오렌부르크였다. 중간에 바이칼호수 인근 시골 역에 내린 것 말고는 하루 두 차례 배급하는 100그램도 안 되는 흑빵으로 버티면서 20일을 꼼짝없이 화물열차에 갇혀 있어야 했다.

오렌부르크에서는 화차에 실려 온 통나무, 시멘트, 석회, 석탄, 건축자재 등을 하역하는 작업과 제재소에서 나온 각목, 판자 등을 운반하는 작업에 동원됐다. 지름 50센티미터, 길이 10미터에 가까운 통나무를 5~6명이 한 조가 돼 쇠 지렛대로 밀고 굴리면서 하역하거나 화차에 가득 실린 시멘트 가루와 석회 가루를 선로에 인접한 창고에 삽으로 떠서 퍼 넣는 작업이었다. 숨 쉴 때마다 시멘트 가루가 코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이 끝난 뒤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면 시멘트 덩어리가 코털을 물고 같이 빠졌다. 온몸에 뒤집어쓴 시멘트 가루를 수건으로 털어내고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밤중에 화차가 들어오면 야간작업을 해야 했다. 동틀 무렵까지 밤샘 하역 작업을 하다 수용소에 돌아와 흑빵 한 조각과 죽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쉴 틈도 없이 트럭에 실려 6킬로미터 떨어진 아파트 건축장에서 고랑 파기 작업에 끌려가기도 했다. 셀레트칸과 다르게 오렌부르크에서는 하루 세끼 흑빵과 수프 또는 죽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1947년 6월께 아파트 건축장 근처에 있는 오렌부르크 제2 수용소로 옮기면서 조선인 포로들은 독립부대로 분리됐다. 지상에 목재로 지은 수용소 복도를 사이에 두고 동쪽은 조선인, 서쪽은 일본인 호라우치대의 포로들을 수용했다. 조선인 포로들은 이곳에서 석탄, 석회, 목재, 철제, 염료, 못, 코크스, 모래, 자갈, 벽돌 따위를 아파트 건축장까지 나르는 하역 작업을 했다.

독립부대로 편성되기 전까지 조선인 포로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쉴 수 없었다. 작은 잘못으로도 얼차려를 받거나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통역 대부분이 일본인이어서 조선인 포로들의 심경을 대변해주지 못하거나 왜곡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인 포로에 비해 위험하고 험한 작업장에 배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김수용은 “조선인과 일본인 포로 사이의 폭력, 사망 사건이 일어나고 충돌이 잦아지면서 소련의 수용소 구조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며 “그로 인해 소련이 애초 포로 관리를 원활하게 하려고 온존시켰던 일본의 군대조직이 더는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고, 소련 당국은 조선인 포로의 독립부대 편성을 승인하게 됐다”고 했다.

하바롭스크 380수용소 집결

1948년 11월 28일 귀국선에

1948년 10월 7일 아파트 건축장에서 청소 작업을 하던 조선인 포로 전원에게 집합 명령이 내렸다. 트럭을 타고 제1 수용소로 가 소지품 검사를 받은 뒤 오렌부르크역에서 대기 중인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소련 감시병들이 “다모이”(고향으로, 귀국)라고 알려줬다.

“다모이가 틀림없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험한 작업장으로 끌고 가는 것일까. 희망과 불안이 엇갈려 화차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다.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기관차를 보고 일말의 희망을 건다. 다모이, 다모이. 이번만은 다모이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한결같이 바란다.”(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88쪽)

2년 5개월 전 셀레트칸에서 오렌부르크로 올 때와 다르게 이번엔 하루 세끼 급식에 양도 넉넉했다. 노보시비르스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는 목욕도 시켜줬다. 열차는 바이칼호수와 셀레트칸을 지나 20일만인 10월 27일 저녁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하바롭스크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소련은 시베리아 각지에 수용된 조선인 포로 2300여 명을 하바롭스크 380수용소에 한데 모았다. 수용소에는 포로들이 운영하는 이발소와 구두 수선소가 있었고, 철로 주변 제설 작업이나 하역, 운반 작업 등도 감시병 없이 포로들 자율에 맡겼다.

하바롭스크 수용소에서는 ‘민주운동’이 활발했다. 민주운동은 소련이 일본군 포로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려고 시작했다. 소련군 정치장교 이반 코발렌코는 일본 이름 오바 사부로(大場三郎)로 위장해 소련 전역의 수용소 일본군 포로들에게 배포하는 <일본신문>을 편집했다. 노동이 면제되는 장교들에 대한 하급 병사들의 불만은 ‘반군 투쟁’으로 이어졌고 ‘전범 적발’로 발전해갔다. 하바롭스크에서 포로들은 매일 작업을 마치고 저녁 식사 뒤 밤 10시까지 정치학습에 참가해야 했다. 민주운동을 소홀히 하거나 반대하면 귀국이 지연된다는 두려움이 컸다. 민주운동에 적극 앞장섰던 일본인 포로 ‘악티브’(적극분자)들은 귀국한 뒤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규철은 하바롭스크 380수용소에서 한 달 동안 수용됐다가 11월 27일 열차를 타고 다음 날 블라디보스토크 동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 나홋카역에 내렸다. 역전 광장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억천만년 오래오래 살아가리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빛나는 대한’을 부르면서 귀국의 기쁨을 나눴다. 분대별로 정렬해 부두로 향한 포로들은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귀국선에 올랐다. 소련 화객선 노보시비르스크호였다. 저물녘 나홋카항을 떠난 배 안에서 포로들은 ‘시베리아 대지의 노래’를 불렀다. “시베리 에니세 물결아. 잘 있거라 자작나무 숲아. 네 품에 자란 어린이들은 내 고향 찾아 떠나련다. 시베리아여. 우리들의 자유와 청춘 보람을 심어주던 정든 고향 시베리아.”

귀환이 아니라 인양(引揚)? 마이즈루 인양기념관

일본 교토부(京都府) 북쪽 끝에 자리한 마이즈루(舞鶴)시에는 시베리아 억류와 귀환 관련 자료 1만6000여 점을 소장해 전시하는 마이즈루 인양기념관(舞鶴引揚記念館)이 있다. 1945년 10월 7일부터 1958년 9월 7일까지 시베리아 억류자 등 약 66만 명이 마이즈루항으로 귀환했다. 이곳은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浮島丸)가 의문의 폭발로 침몰해 수천 명이 사망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45년 8월 22일 한국 강제징용 노동자와 가족 등 8000여 명을 싣고 일본 북동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해 가던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방향을 바꿔 마이즈루만에 들어와 멈춰 선 뒤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침몰했다.

마이즈루시가 운영하는 인양기념관은 1988년 문을 열었다. 설립 비용은 시비와 시베리아 억류자, 시민들의 모금으로 마련했다. 2015년 9월 기념관을 새로 꾸며 재개관한 뒤 그해 10월 소장 자료 570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야마시타 미하루(山下美晴) 전 관장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에는 연간 9만여 명이 기념관을 관람했다. 전시뿐 아니라 학예원 강사가 초등학교 등에 가서 출장 강좌를 여는 평화학습과 다른 지역 학생들이 기념관에서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는 교육여행 사업도 하고 있다. 마이즈루시는 많은 시베리아 억류자들이 귀환선을 탔던 러시아 나홋카시와 1961년 자매도시가 됐다.

2020년 동아시아일본학회가 펴낸 <일본문화연구> 제73집에 실린 논문 ‘피해의 범주에서 소거된 비국민,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 문제-마이즈루 인양기념관 전시 형태를 중심으로-’에서 김수용은 “일본은 패전의 기억을 소거하기 위해 ‘인양(引揚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면서 “군인‧군속을 포함하는 귀환사업에 ‘인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전쟁에 참가한 군인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소거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수용은 마이즈루 인양기념관의 전시 서사(내러티브) 분석을 통해 “자국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왜곡된 피해자 의식은 자신들의 가해를 상상할 수 없게 해 그릇된 평화관을 구축했다”며 “비참한 전쟁에 다시는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전쟁이 가능한 힘 있는 나라가 돼야 한다는 ‘일국 평화주의’가 그것”이라고 비판했다. 마이즈루 인양기념관에는 전쟁을 일으킨 가해의 책임을 일본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거나 관동군에 강제징병돼 시베리아에 함께 억류됐던 한국인 포로들에 관해 알 수 있는 전시물은 단 한 점도 없다. 

한국인 포로 지워버린 도쿄 평화기념자료전시관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도청역에서 1분만 걸어가면 지상 52층 210미터 높이의 스미토모 빌딩을 만날 수 있다. 이 빌딩 33층에 일본 정부(총무성)가 위탁해 운영하는 평화기념전시자료관(平和祈念展示資料館)이 있다.

일본은 1988년 평화기념사업특별기금등에관한법률을 제정해 시베리아 억류자들에게 지급할 ‘위로금’ 형태의 기금을 마련하고 평화기념사업특별기금이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평화기념사업특별기금은 2000년 11월 평화기념전시자료관을 개관해 2010년까지 운영했다. 해산을 앞둔 평화기념사업특별기금의 소장 자료를 2010년 10월 일본 정부(총무성)가 승계하면서 전시관은 국가 운영(총무성 위탁)으로 바뀌었고, 2018년 3월 새로 단장해 재개관했다.

전시관은 징병 병사들과 전후 시베리아와 몽골 강제 억류, 인양 관련 자료 약 2만3000점을 소장하고 있고, 이 중 약 400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약 1만4000권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에서는 약 2000권의 도서와 전쟁과 시베리아 억류 체험자, 인양자의 증언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시베리아 억류 사망자 명부도 비치돼 있다. 평화기념사업특별기금이 체험 수기를 정리한 <평화의 초석>(병사편, 억류편, 인양편 각 19권)과 디지털북으로 제작한 선집 4권도 볼 수 있다. 2013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전쟁과 시베리아 억류 체험담을 듣는 이야기 모임도 열고 있다. 카토 츠무기(加藤 つむぎ) 평화기념전시관 학예사는 코로나19 이전에는 연간 약 5만 명이 전시관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마이즈루 인양기념관에서 여성 억류자들의 존재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데 반해 평화기념전시자료관에서는 간호병 여성 포로들에 관한 자료를 따로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마이즈루 인양기념관과 마찬가지로 도쿄 평화기념전시자료관에서도 시베리아 억류 일본군 조선인 포로들에 관한 전시물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김수용은 “시베리아 일본군 피해자들은 냉전이 종식된 후 한국의 피해자들과 연대해 그들의 복권과 배‧보상을 위해 함께 투쟁했지만 전시관이나 세계기록유산에는 ‘비국민’이 된 강제동원 피해자의 존재뿐 아니라 이들의 연대라는 동아시아에서 진정으로 평화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함께 지워버렸다”며 “동아시아 각국이 벌이는 기억의 전쟁으로 일본이 다시 그들과 마주해야만 하는 이때 이들을 모두 시야에 넣는 전쟁기억의 재(再)유산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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