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썩은 사과 하나

2024-09-06

여기 거울 앞에 빨간 사과 하나가 놓여 있다. 거울에 비친 사과는 빨갛게 익은 게 탐스럽고 먹음직스럽다. “세상에서 어느 사과가 가장 예쁘니?”라고 물으면 누구나 이 사과를 꼽을 정도다. 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보면 거울에 비치지 않은 쪽은 온통 썩은 채 흉하게 파여 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새삼 일깨워주는 거울 속 사과의 역설이다. 문제는 사과가 썩으면 그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썩은 사과 하나가 바구니 속 사과를 모두 다 썩게 만든다.” 오랜 서양 격언이 최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다시 회자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매 시즌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스타플레이어 영입에 혈안이었지만 정작 팀 성적엔 실력이나 인기보다 인성이 더 중요하더라는 깨달음이 반영된 결과다. 여기엔 기껏 스타들을 모아놨더니 서로 화합하긴커녕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면서 모래알 팀워크가 돼버린 몇몇 인기 구단의 사례도 한몫했다. 자기밖에 모르는 썩은 사과가 동료들까지 오염시키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경험칙이 세계 최대 규모의 이적시장에서도 반면교사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썩고 부패한

바구니 속 사과는 이제 들어내야

사과가 썩는 건 ‘에틸렌’이란 호르몬 때문이다. 식물의 숙성과 노화를 동시에 촉진시키는 호르몬으로,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한 과일을 빠르게 숙성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반면 과육을 무르게 하는 탓에 쉽게 부패하게 만드는 치명적 단점 또한 갖고 있다. 게다가 스스로 합성을 촉진하는 속성상 한번 발생하면 억제하기가 쉽지 않고, 다른 호르몬과 달리 기체 상태로 존재해 이동에도 용이하다. 이러니 바구니 속 썩은 사과가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과일을 썩고 문드러지게 하는 데 일등공신이 될 수밖에 없다. 사과를 장기 보관할 때 에틸렌부터 제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도 곳곳에서 썩은 사과가 내뿜는 에틸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와 관련, 경영학자 미첼 쿠지와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홀로웨이는 일찍이 『당신과 조직을 미치게 만드는 썩은 사과』라는 책에서 조직을 망가뜨리는 존재를 썩은 사과에 비유했다. 이들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임직원 40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썩은 사과의 법칙’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반드시 조직에 손실을 가져오고, 쉽게 드러나지 않으며, 결코 혼자 썩지 않고, 절대 원상 복구되지 않는다는 특징은 사람이든 사과든 다를 게 없더라는 연구 결과였다.

썩은 사과로 지목된 사람들의 특성도 주목할 만하다. 자아 인식과 자기 조절 능력이 매우 부족하고, 공감 능력은 발견하기 힘들며, 오히려 자신이 가장 유능하다는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있기 십상이란 게 공통점이었다. 겉으로 볼 땐 멀쩡하지만 속은 ‘교만’과 ‘탐욕’이란 독성 물질로 가득하고, 자신이 썩은 사과임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전염성이 너무 강해 주위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점도 똑같다.

더 큰 재앙은 이런 자가 조직의 리더일 경우 그 해악은 훨씬 더 커지기 마련이란 점이다. 더 나아가 썩은 사과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며 조직의 실세로 군림하려 하고, 심지어 썩은 사과가 정상인 사과라며 사회적 기준까지 바꿔 버리려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이만큼 유지되는 건 여전히 우리의 사과밭에서 수많은 온전한 사과들이 자라나고 있기 때문일 거다. 교만과 탐욕이란 독성 에틸렌의 확산을 공감과 존중과 상호 연대를 통해 힘겹게 막아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사실 속까지 썩은 ‘사람’이 문제지 사과가 무슨 죄가 있겠나.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라는 노래처럼 맛있는 과일의 대명사였건만 ‘심심한 사과’ 논쟁에 휘말려 고생까지 해야 했으니 더 늦기 전에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하지 않겠나. 썩은 사과는 이제 그만. 마침 역대급 폭염이 지나가고 드디어 가을, 에틸렌 걱정 없는 갓 따온 풋풋한 햇사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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