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알토라고 부르지만, 내 이름은 벅이다. 태어난 지 다섯 달쯤 지났을 때 나를 입양한 보호자가 지어준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조그만 내가 귀엽다며 집으로 데려갔지만 희귀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길에 버렸다.
집 안에서 생활하는 데 길들여진 고양이가 길 위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춥다는 사실을 세 살에 처음 알았고, 길에서 태어난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적응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편이다.
나는 사시사철 감기에 걸려 있고, 털은 뭉쳐 있고, 귀에는 진드기가 가득하며, 뱃속에는 작은 비닐과 플라스틱 조각들이 들어 있다. 내게는 이빨이 없다. 구내염에 걸린 탓에 이를 모두 뽑아야 했다. 그러나 벅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난 뒤 나는 마침내 계절과 만나게 되었고, 이빨 하나 없이 사료를 삼키며 기꺼이 더위를 견뎌낸다.
두 번째 보호자인 그는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는 집 앞 공터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사료와 물이 담긴 두 개의 그릇을 내놓았으나 이웃의 반대로 밥자리는 산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구역으로 간다. 사실 거기는 인간의 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긴 누구의 공간도 아니다. 인간들은 저희들끼리 땅을 나누어 갖고 서로에게 사고팔지만, 이 세상 어떤 장소도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웅크리고 숨어다니는 이유는 그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폭력을 싫어하듯, 인간은 더운 여름을 싫어한다. 그들은 더 이상 계절을 사랑하지 않는다. 숨 막히도록 뜨거운 햇살, 이 계절의 풍요와 열정을, 더위를 견디고 난 뒤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면역력과 건강한 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고작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작은 기계와 여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열기가 일깨우는 성숙한 결실을, 정신을 황홀하게 만드는 따가운 햇볕과 부드럽고 축축한 바람의 자비를, 세차게 쏟아지는 비의 박력을, 순환과 공존 속에서 어우러질 능력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차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나를,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는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가 생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집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 안다. 그는 내 첫 보호자와 마찬가지로 에어컨과 보일러를 방패 삼아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내게 사료와 물을 제공하고 나는 그에게 생을 가르친다. 생은 편리와 풍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순환을 견디는 일이다. 생의 기쁨은 거기에 있다. 그가 내게 삶은 닭가슴살을 내밀 때, 짙은 마스카라를 한 듯 사계절 내내 검은 눈곱을 단 내 두 눈은 그를 맹렬하게 바라본다.
여름을 피하지 말고 견디라고. 이 뜨거운 계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다음 계절을 살아갈 자양분이 거기에 있다고. 여름은 너의 몫이라고. 여름을 모르는 자에게 가을이 찾아올 리 없고, 가을을 모른다면 겨울을 견딜 능력 또한 사라져버리는 거라고. 나는 가혹한 생을 살지만, 너는 생을 살지 못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