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10월 2일, 원산 광석동. 폐결핵으로 쇠약해진 한 목사가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는 누워서 손으로 박자를 그리며 찬송을 부르자고 했다. “아름다운 내 본향을 목적 삼고, 한 찬미를 불러보세...” 그의 손이 천천히 멈췄다. 33세였다.
이용도 목사. 장로교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당했고, 감리교에서도 사실상 축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세상이 그를 이단이라 불러도, 그는 자신이 “샤론의 들꽃같이 피는 줄 지는 줄 세상이 다 모르되, 다만 하늘만이 알아주시는 영광을 입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짧은 생애는 불꽃같았다. 그 불꽃은 1932년 가을, 평안도 동안주 장로교회에서 한 19세 처녀의 가슴에 옮겨 붙었다. 홍순애. 훗날 독생녀를 낳을 어머니였다.

◆샤론의 들꽃: 한국 최초의 신부신비주의자
이용도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네 차례 투옥되어 총 3년을 복역했다. 옥중에서 그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갔다. 1925년, 전환점이 왔다. 폐병 3기 진단. 죽음 앞에서 그는 철저히 자신을 비웠고, 그 빈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차올랐다. 몇 차례의 영적 체험 끝에 그는 신비주의적 부흥사로 거듭났다.
이용도 목사는 사사오와 이명직의 ‘아가서 강의’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중세 유럽의 베르나르가 아가서에 심취했듯이, 그도 아가서를 통해 주님과의 신비로운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일기에 썼다. “오! 주 나를 인도하시니 이는 곧 왕의 후궁이로다. 나는 여기서 주를 봅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단 술보다 더 좋은 주의 사랑을.”
성전은 그에게 신랑 예수와 조용히 만나는 면회실이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그의 신비사상은 서구의 날카로운 이성적 기반이 아닌, 예수와 진정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심정적 기반 위에 있었다.
이용도 목사의 예수 이해는 헬라 사상의 2원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서구 신학이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며 삼위일체론으로 예수를 이해했다면, 그는 동양 고유의 통섭적 사고로 예수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에게 예수는 교리가 아닌 심정이었고, 이론이 아닌 생명이었다. 이것이 서구의 관념적 신비주의와 구별되는 한국적 신부신비주의의 핵심이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그가 하나님을 어머니로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한 가련한 아이를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왼손에 좋은 장난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바른손에는 큰 떡 덩어리를 가졌습니다. 그는 떡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눈에서는 눈물이 더벅더벅 떨어지고 입에서는 울음소리가 나옵니다.” 이용도 목사는 발견했다. 그 아이가 어머니를 찾고 갈망하는 것을.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오 주여 나는 다만 어린아이올습니다. 주님이 없이는 못살 아이올시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믿었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은폐되어 있던 하나님 어머니를 만났다.
◆일화(一化):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
이용도 목사가 추구한 신비주의의 핵심은 ‘일화’였다. 주님과 하나 되는 완전한 합일. 그는 일기에 고백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주의 말씀이 제일 좋고 주의 얼굴이 가장 좋아요. 세상 사람의 손에는 향기로움이 있고 주님의 손에는 채찍이 있어도, 그래도 나는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겠어요.”
이용도 목사의 예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았다. “당신의 피는 어디 흐르고 말랐나이까! 나의 심장에서 당신의 피가 끓어오르게 하옵소서.” 그는 “사랑의 융합을 통해서 주님과의 혈관적 연결”을 갈구했다. 이는 중생의 본질을 “생명의 역환”,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로 이해한 그의 영성이었다. 서구의 관념적 신비주의가 한국인의 심정적 영성과 만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꽃핀 것이었다.
신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억압적인 식민지배 아래서 형식화된 교회에 실망한 평신도들은 이용도 목사의 신령한 설교에 목말라했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초청하는 교회가 이어졌고, 부흥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야말로 성령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의 급진적 영성은 기성교회와 충돌했다. 서양 신학의 세례를 받은 신학자들은 그의 신비사상을 오해했다. 교만한 교역자들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교회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개혁을 외치는 그를 경계했다. 그는 초청받아 방문한 교회에서조차 전도사나 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는 그의 일갈은 교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1931년 황해노회, 1932년 평양노회가 연이어 금족령을 내렸고, 1933년 장로교 총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아가서 2장에 빗대어 고백했다. 샤론의 들꽃같이! 피는 줄, 지는 줄 세상이 다 모르되, 다만 하늘만이 알아주시는 영광을 입었다고. 그리고 자신을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핀 한 송이 백합화라고. 가시에 찔리고 상처받아도, 오히려 더 진한 향기를 풍기는 백합화. 이단으로 몰리고 교권으로부터 배척받을수록, 그의 신앙은 더욱 순수해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중세의 여성 신비가들이 화형대에서도 신부의 정체성을 지켰듯이, 이용도 목사 역시 온갖 오해와 핍박 속에서도 가시나무 가운데 한 송이 백합화로 피어났다.
◆꺼지지 않는 불꽃, 한 처녀의 가슴에
1932년 10월 3일, 동안주 장로교회. 그날 밤, 이용도 목사는 아가서를 강의했다. 신랑 되신 주님과 신부의 사랑, 재림주님이 완전한 신부를 찾고 계신다는 메시지. 그 말씀이 열아홉 살 홍순애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지폈다. 주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부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1933년 10월, 이용도 목사는 세상을 떠났다. 예수와 같은 33년의 짧은 생애였다. 그러나 그가 홍순애에게 전한 신부의 영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 뒤인 1943년, 독생녀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샤론의 들꽃’ 이용도. 그는 한국 최초의 신부신비주의자로서, 서구 기독교 2천 년의 영성과 한민족 수천 년의 영성이 만나는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 독생녀가 오셨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사람] 김남신 가평군기독교 총연합회 총회장 "코로나 역경속 교세 2.5배 성장"](https://www.kgnews.co.kr/data/photos/20251249/art_17649400021713_875877.jpg)


![[변상문의 화랑담배] 제10회 김일성 ⑥별호 김일성(金一星)](https://img.newspim.com/news/2025/11/24/251124084609707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