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구니의 큰 스승 ‘묘엄 평전’ 출간

2025-12-18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지금까지 평전이 나온 스님은 모두 4명이다. 12년 전 성철스님을 시작으로 용성스님, 만암스님, 혜암스님의 평전이 차례로 출간됐다. 불교계에서 평전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단순한 전기가 아닌, 한국 불교의 방향을 바꾸고 기준을 세웠다는 평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근 5번째로 묘엄스님(1932∼2011) 평전이 출간됐다. 비구니 스님으로는 첫 평전의 주인공이다. 비구니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는 묘엄스님은 비구니 교육의 체계를 세웠고 인권과 교단을 확립하는데도 혁명적 역할을 했다. 비구가 율사(불교 계율에 정통한 승려)를 장악하고 있던 풍토에서 스님은 최초의 비구니 율사로 불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업적도 업적이지만 묘엄스님은 청담스님(1902∼1971)의 딸이자 성철스님의 첫 비구니 제자라는 인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청담스님은 성철스님과 함께 한국 불교 중흥의 기틀을 닦았으며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청담스님의 표현을 빌면 묘엄스님은 ‘파계의 씨’의 결과물이다. 청담스님은 출가 당시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이 가는 수행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며 이혼을 하고서도 시어머니를 모셨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청담스님의 모친은 스님이 된 아들을 찾아가 눈물로 애걸했고, 급기야 청담스님은 경남 진주의 옛집으로 찾아와 부인과 하룻밤을 보낸다.

1932년 음력 1월.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 인순, 즉 묘엄스님이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묘엄스님은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부모가 이혼한 뒤 태어난 상태라 당시 호적에 사생아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진학하지 못하면 종군위안부로 끌려가야 할 상황에서 어머니는 편지 한장을 쥐어준 채 딸을 아버지 청담스님이 머무는 경북 문경 대승사로 보냈다. 청담스님은 도반인 성철스님(1912∼1993)에게 딸의 출가를 부탁했다.

“니, 중 될 생각이 없나?”하는 성철스님의 질문에 인순은 “비천해 보이는 여자 중은 안될 것”이라고 당차게 대답한다. 하지만 총명하고 자기 주관이 분명히 서 있던 인순을 기특히 여긴 성철스님은 틈나는 대로 우주만물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지식의 풍요함에 조금씩 물들어가던 인순은 성철스님에게 묻는다. “제가 출가를 하면 스님이 아는 것을 저한테 다 가르쳐줄랍니까?” “가르쳐주지, 암만” “그러면 제가 중이 되겠습니다”.

성철스님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잘 배워서 네가 비구니계의 혁명을 일으킬 큰 스님이 되라”고 했다. 인순은 성철스님에게서 묘엄이라는 법명과 계를 받았다. 성철스님에게 계를 받은 비구니는 묘엄스님이 유일하다. <묘엄 평전>에선 “묘엄은 일평생 바다보다 깊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신심 깊고 지혜로우며 자비로운 수행자로 성장해 비구니계의 우뚝 솟은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했다”고 쓰고 있다.

이번 평전은 묘엄스님의 상좌이자 봉녕사 주지인 진상스님이 묘엄평전간행위원회를 꾸려 3년간의 자료조사와 연구, 지인들의 회고를 모은 끝에 이뤄졌다. 수행자의 삶에 대해 꾸준히 써 온 박원자 작가가 집필했다. 평전간행위원장을 맡은 봉녕사 주지 진상스님은 18일 기자간담회에서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출가한 사람들은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아쉬움이 클 것”이라며 “그러한 아쉬움을 은사스님의 숨결과 치열한 일생이 담긴 평전을 통해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출판기념식은 오는 26일 수원 봉녕사에서 14주기 추모 다례재와 함께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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