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11-20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휴전 이듬해인 1919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 독일에 가혹한 제재를 부과했다. 군용기는 물론 아예 독립한 공군 자체를 보유할 수 없게끔 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나치 정권이 출범하며 독일은 재무장에 돌입했다. 1935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할 당시 독일에는 이미 국제사회 몰래 육성한 막강한 공군이 존재했다. 독일의 공군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히틀러의 눈에 남유럽의 한 나라가 들어왔다. 파시스트 반란군과 공화주의 정부군 간에 내전이 벌어진 스페인이었다.

반란군을 이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과 그 무리는 나치즘과 유사한 파시즘에 물들어 있었다. 이에 독일은 군대를 보내 스페인 반란군을 돕기로 했다. 같은 파시스트 세력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도 히틀러와 행동을 같이했다. 독일 공군은 각종 신무기 성능을 시험할 장소로 스페인 전선을 택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Guernica) 상공이 독일 군용기들로 뒤덮였다. 정부군의 이동로 차단을 이유로 도시에 융단 폭격을 가했다. 하늘에서 느닷없이 내려온 불벼락에 수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 세계 각국은 그간 미처 몰랐던 독일 공군의 가공할 화력에 경악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던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모국에서 전해진 참상을 듣고 느낀 충격과 분노를 거대한 화폭에 담았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반전(反戰)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르니카’(1937)가 탄생한 배경이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피카소는 “프랑코 집권 기간 동안에는 ‘게르니카’의 스페인 내 전시·보관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미국 뉴욕에 있던 ‘게르니카’는 프랑코가 죽고 스페인이 민주화된 이후인 1981년에야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오늘날 세계 평화를 논의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바깥 벽에는 ‘게르니카’를 태피스트리로 제작한 작품이 내걸려 있다. 안보리 이사국 대표들에게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18일 스페인을 방문했다. 그리고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의 안내로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 소장한 ‘게르니카’를 관람했다. 젤렌스키는 개전 초반인 2022년 4월 스페인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한 원격 화상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마치 1937년 4월처럼 느껴진다”며 “바로 그때 전 세계가 스페인의 도시들 중 하나, 곧 게르니카란 이름을 알게 됐다”고 외쳤다. 러시아군의 무차별 공습에 많은 우크라이나 어린이 등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는 참상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강대국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조국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애쓰는 지도자의 발버둥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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