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계엄·탄핵사태 이후 민주주의 더 발전
‘말 앞에 수레를 놓지 말라’…국가 위기 타개가 대선정국보다 선행
엘 고어 만나고, 국내 정치·경제 해법 알리고…‘동분서주’ 다보스포럼
한국 정치인 유일 올해 다보스포럼 초대…명함 들고 CEO들 만나 협력
각국 정상급 인사들과 신뢰관계 형성…마르탱 장관 등 먼저 만남 요청
인구 1만명 남짓의 스위스 다보스는 해발 1560m에 있는 휴양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의 눈 덮인 크고 작은 스키 리조트들은 겨울철 투숙객들로 붐빈다. 맑은 공기 때문에 근대 이후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소가 들어섰고,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이곳 요양소들을 배경으로 소설 ‘마의 산’을 집필하기도 했다.
좁은 계곡을 끼고 곳곳에 고산 목초지가 자리한 이 시골 마을이 세상의 이목을 끈 건 온전히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 포럼)’ 덕분이다. 제네바 대학의 경영정책 교수였던 클라우스 슈밥이 1971년 민간재단인 ‘유럽경영포럼’의 문을 열었고, 1973년 전 세계로 확대했다. 1981년 다보스로 자리를 옮긴 포럼은 1987년 개칭을 통해 ‘다보스포럼’으로 불리게 된다.
이 포럼의 운영방식을 둘러싸고 일각에선 날 선 비판이 일었지만 한국은 2000년대부터 꾸준히 특사를 파견하거나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현장에서 연설할 만큼 공을 들였다. 지금도 국내 주요 대기업 경영진들이 이곳 연례행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 미·영·프·독 등 통신·일간지·방송에 계엄·탄핵사태 브리핑
21일(현지시간) 숙소에서 다보스로 향하는 1시간30분 남짓의 여정 역시 쉽게 풀리지 않았다. 평화롭게 동네 어귀에서 아이스하키를 즐기는 소년들과 달리 회의장 안팎은 분주한 모습이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곳을 찾는다는 얘기가 전해진 탓이다. 인근 고개부터 회의장을 둘러싼 경계태세는 삼엄하게 바뀌는 듯했다.
회의장 밖 카페에서 마주한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불쑥 대선 얘기를 끄집어냈다. 순간 기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엄·탄핵 사태를 겪으며 야권의 대권 잠룡으로 분류돼온 김 지사였기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온통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김 지사는 평소와 같이 속담을 끄집어내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을 인용해 “이번 위기(계엄·탄핵사태)에서 벗어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강해지고, 경제는 번영할 것”이라고 했고, ‘말 앞에 수레를 놓지 말라’는 속담으로 대선 출마 가능성을 묻는 말에 답했다. 국가의 안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치적 욕심보다 정상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날 그의 대선 전망과 국내 정치 분석은 어느 때보다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불법계엄과 내란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응징에 대한 분위기가 있고, 향후 처리방식에 국민의 불안감 역시 영향을 미칠 겁니다. 한국 정치의 전망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여러 변수가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지난달 이후 몇 주간 K-드라마라 불릴 만큼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됐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헌법재판소 판결 60일 이내에 새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데 불법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배출한 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 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김 지사는 이날 포럼에서 세계 언론 관계자들과 만나 국내 상황을 알리고 정치·경제 해법을 제시했다. 당시 회의장에서 질문과 답변을 회의장 밖 기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단호한 어조의 발언들이 쏟아진 것이다.
‘2025 다보스 포럼’ 사무국이 마련한 이날 특별 세션은 ‘김동연 지사와의 대화’라는 미디어 브리핑 형태로 진행됐다. 요청을 받고 연단에 선 그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말레이시아 등 7개국 유력 통신사·일간지·방송기자와 편집장 등을 상대로 ‘정치적 불확실성 제거’와 ‘경제재건’이라는 자신의 구상을 내놓았다.
그가 내세운 해법은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탄핵 인용 및 조기 대선 △경제전권대사 임명 △새롭게 출범한 정부의 ‘완전히 새로운 정책’이었다. 지난 몇 주간 국내에서 벌어진 상황을 K-드라마에 빗대 “예측하기 어렵고 반전이 있다”며 “증거가 확실한 만큼 탄핵이 인용될 것으로 기대하지만 새 정부 출범 전까지 몇 달간 리더십 공백과 관련된 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엘 고어 “혼란은 우리도 마찬가지”…金 지사와 정책·정치연대
이어 불법 계엄을 막아낸 시민들의 수고를 전하면서 “역경이 견고함을 만드는데 한국인의 잠재력과 회복력을 확신한다. 역사 자체가 증거”라고 강조했다.
김 지사는 “(비상계엄 저지와 탄핵을 위해) 매일 밤 응원봉으로 밤거리를 밝히던 평범한 사람들이 (탄핵 후) 일터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는 사람들”이라며 “이들과 함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며, 국가 경제를 회복하는 데 있어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어 “지금 우리가 겪는 진통은 단지 성장통이었다는 사실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디어 브리핑 형식의 이번 세션은 국내 야당 인사나 시·도지사가 처음 진행을 맡은 행사였다. 국내 정치인 가운데는 2013년 대통령 당선인 특사 자격으로 방문한 이인제 당시 새누리당 의원 이후 12년 만이다.
“올가을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각료회의(APEC·에이펙) 회의는 예정대로 한국이 호스트를 맡아 국내에서 진행될 것으로 봅니다. 이를 잘 개최해 대한민국의 건재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모든 주제가 테이블 위에서 올려질 것이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다면 그동안 경기도가 추진해온 첨단산업과 기술, 산업정책, 기후변화 정책에서 궤를 같이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에 하나 정권교체가 안 되더라도 지사로서 흔들림 없이 이 같은 정책들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김 지사는 이날 각국 정상급 인사들과 신뢰관계 형성을 위한 만남도 이어갔다. 2006년부터 ‘클라이밋 리얼리티 프로젝트’를 이끄는 엘 고어 전 부통령과 세 번째 만남을 갖고 정책·정치 연대를 재확인했다.
정권마다 바뀌는 기후정책과 지방정부의 역할을 논의한 두 사람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흔들리는 미국의 기후 대응 정책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향후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는 동지적 관계를 이어갈 것이란 암묵적 의사도 확인했다.
엘 고어 전 부통령은 복잡한 국내 정치 상황을 전하는 김 지사를 향해 “우리도 마찬가지”라며 트럼프 행정부 출범이 가져올 앞선 민주당 정부와의 괴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간킴용 싱가포르 경제부총리, 로랑 생마르탱 프랑스 통상장관과의 만남에선 지역 간 협력 강화를 약속하며 조만간 서로를 초대해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특히 마르탱 장관과는 인공지능(AI)·반도체·에너지 분야의 협력을 약속하며 즉석에서 메신저 ‘왓츠앱’ 친구 맺기를 통해 친분을 쌓았다.
김 지사는 전날 개막행사 격인 ‘이노베이터 커뮤니티 리셉션’에선 전기수직이착륙기 개발 분야의 선두 스타트업인 아처에비에이션의 애덤 골드스타인 최고경영자(CEO) 겸 공동 창립자, 자율주행트럭을 개발한 아인라이드의 로버트 팔크 CEO 등과 교류하며 도내 투자 가능성을 타진했다.
다보스(스위스)=오상도 기자 sdoh@segye.co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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