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평화운동가 조성우, 그리울 겁니다

2025-01-21

조성우, 그는 늘 청년이었다. 굽힘 없는 기개는 세상을 덮고도 남았다.

성우형이 몹쓸 병을 앓는다는 소식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성우형이라면 금방 이겨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의 말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 암세포와 싸우기 위해 입원을 앞두고 있는데도 잠시 어디 나들이 다녀오는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쓸쓸함을 가슴에 담고 가게 했다는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신군부세력은 1983년 청년운동가 조성우를 일본으로 추방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그는 ‘평화’라는 화두를 갖고 귀국했다. 성우형은 항상 당당했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후배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의 이야기는 잘 우린 묵은 간장 같은 깊은 맛이 있었다. 권위라는 휘장도 두르지 않았다.

우리는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놓고 쉼 없이, 자유롭게 논쟁했다. 어느 날 나는 평화는 ‘더불어 어울림’이라고 말했다. “나라와 나라가 더불어 어울릴 때는 세계평화,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어울릴 때는 환경평화, 권력과 인간이 더불어 어울릴 때는 인권평화, 남과 북이 더불어 어울릴 때는 한반도 평화, 남성과 여성이 어울릴 때는 양성평화….” 성우형은 맞장구를 쳐줬다. ‘어울림’이 ‘더불어’를 내포하고 있으니 평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어울림’이라고 정의하자고 했다.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의 지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던 1988년, 성우형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를 제안했다. 탈냉전이 진행되던 1990년대 내내 8·15를 맞이할 때면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은 남과 북에서 태풍의 눈이 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성우형은 통일운동의 성장한 힘을 바탕으로 진보와 보수가 연대하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결성을 주도했다. 민화협이 추진한 보수와 진보의 대화는 오늘날 진영 대결의 파고 속에서 빛을 보고 있지 못하지만, 진영 대결이 격화될수록 재평가될 것이다.

민화협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에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앞장섰다. 남에서 거침없던 조성우는 북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그는 북한과 만날 때마다 남한 통일운동이 지닌 역동성을 강조했다. 그의 열정은 남한 통일운동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조성우는 영원한 활동가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언제나 ‘활’하고 ‘동’한다. 그래서 치열하고 그래서 ‘좌충우돌’이다. 그렇지만 항상 성찰하기에, 성찰의 힘으로 암세포가 습격하기 직전까지도 자주통일평화연대(옛 6·15남측위) 상임대표, 겨레하나 이사장,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공동의장 등을 맡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활’하고 ‘동’한 것이다.

언제나 거침없는 청춘 조성우가 우리 곁을 떠나니, 시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얼굴들이 흰 바람벽에 스친다. 계엄 선포에 거침없이 맞서는 대한민국 장군이나 고위 공직자 한 명 없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늦봄 문익환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을 읊으며 깊은 꿈속으로 떠나는 그의 손을 겨우 놓는다.

조성우 선배님, 어찌 문 목사님이 떠나신 날에 맞춰 목사님 곁으로 가신다는 말입니까? 슬픔이 더욱 커지니 이 가슴엔 하염없이 눈물만 흐릅니다. 눈물을 훔치며 이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사랑했습니다. 가시는 길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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