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글로벌 에너지 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기술 주도권 경쟁 속에 있다. 재생에너지, 원자력, 에너지저장, 대체연료 등 미래 에너지 패권을 두고 세계 각국은 인공지능(AI)을 동력 삼아 기술혁신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누가 더 빠르고 혁신적인 기술로 시장을 선점하는 지가 핵심이다. 그러나 이런 속도전이 대기업 중심의 성과에 치우칠 경우 에너지 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 공급망 전반에 중소기업이 고르게 분포할 때 비로소 위기에 강한 산업 기반이 마련된다.
AI 기술은 설비 효율을 높이고 유지보수 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의 복잡성을 감당할 수 있는 ‘지능화한 인프라’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개발한 연구개발(R&D) 중소기업이 실제 산업 현장에 진입하려면 기술력 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증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비용, 시장 진입 전까지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대기업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른바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을 넘기 위해서는 기술성숙도(TRL) 6~8단계에 해당하는 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에 대해 후속 R&D와 정책금융을 연계하는 구조가 중요하다.
정부와 공공기관은 중소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실증 현장에서 시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내부 보유 기술을 외부에 이전하거나 기술 컨설팅을 통해 기술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한국전력이 AI 기반 디지털 트윈 기술을 중소기업과 함께 실증한 사례는 이러한 협력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에너지 산업 생태계의 뿌리가 되는 에너지 중소기업은 사업추진 자금 부족을 기술혁신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꼽고 있다. 에너지혁신벤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약 66.7%가 자금 조달 과정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특히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해 은행권과 연계한 에너지 분야 전문펀드를 2022년부터 1700억원 이상 규모로 조성하고 있다.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 같은 에너지 공기업들도 중소기업과 함께 기술사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데 동참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 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은 중소기업이 얼마나 내실 있게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다. 공공영역에서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의 기술·시장 스케일업에 힘을 보태야 한다. 중소기업의 도약은 한국 에너지 산업의 미래를 여는 열쇠이며, 기술패권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우리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승재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