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9쪽 사망자 명부, 첫 14쪽은 ‘0세’ 희생자였다

2024-10-06

연이은 협상 불발로 휴전에 대한 희망조차 사그라들던 지난달 16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보건부는 649쪽에 이르는 긴 명단을 공개했다.

이튿날 벌어진 레바논 ‘삐삐 폭발 사건’의 여파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이 명단은 다름 아닌 ‘사망자 명부’였다. 명부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시작된 지난해 10월7일부터 지난 8월31일까지, 약 11개월간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숨진 4만여명 중 신원이 확인된 3만4344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성별과 신분증 번호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긴 명부의 시작인 14쪽엔 ‘0세’ 희생자들의 이름이 있었다. 첫 생일을 맞기 전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710명의 이름이다. 이 가운데 169명은 전쟁이 시작된 후 태어나 전쟁 통에 죽었다.

명단엔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목숨을 잃은 쌍둥이도 있었다. 지난 8월13일 가자 중부 데이르 알발라의 주택가에서 이스라엘군 포탄에 숨진 아기인 아세르와 아이살이다. 아기들의 아빠인 33세 무함마드 아부 알쿰산이 출생 신고를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공격이 벌어졌다. 알쿰산은 출생 증명서를 쥐고 달려간 시신 안치소에서 주검으로 변한 아기들과 아내의 시신을 마주했다.

태어났을 때 이미 모든 가족을 잃었던 아기도 있다. 사브리네 알루 알셰이크는 지난 4월 이스라엘군의 라파 공격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산모 사브린에게서 태어났다. 의사들이 긴급 제왕절개 수술로 아기를 꺼냈고 머리와 가슴, 복부에 총격을 입은 산모는 10분 후 사망했다. 엄마의 이름을 따 ‘사브리네’라는 이름이 생긴 아기는 5일을 버텼으나 결국 숨졌다. 사브리네 가족 17명이 모두 몰살됐다.

0세부터 101세에 이르기까지, 연령순으로 배열된 사망자 명단엔 10세 이하 어린이들의 이름이 126쪽까지 이어졌다.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3만4344명 가운데 어린이는 모두 1만1355명. 희생자 10명 가운데 3명이 어린이였다. 성인 사망자(18세)의 이름은 215쪽에 이르러서야 처음 등장했다.

마지막 12쪽은 77세부터 최고령인 101세까지, 노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담겨 있었다. 모두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태어나, 지금은 이스라엘 영토로 변한 고향 땅에서 쫓겨난 ‘나크바(대재앙)’의 비극을 경험한 이들이다.

그러나 600쪽이 넘는 이 긴 명단조차도 전체 희생자 규모를 말해주진 못한다. 이름 없는 사망자도 있다. 지난 8월 말까지 집계된 전체 사망자 약 4만738명 가운데 6394명은 시신이 병원과 영안실 등에 인도됐으나 신원이 아직 파악되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후 한 달 새 사망자는 더 늘어나, 5일 기준 가자지구 누적 사망자는 총 4만1825명이다. 부상자는 9만6910명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참상의 규모와 실종자 수치로 미뤄볼 때 약 2만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묻힌 채 아직 수습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 7월 영국 의학저널 랜싯에 게재된 논문은 공습에 따른 직접 사망자뿐만 아니라 간접 사망자까지 고려하면 전쟁 이후 가자지구에서 18만6000명이 숨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스라엘인 1139명을 살해하고 250여명을 인질로 끌고 간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흘렀다. ‘하마스 궤멸’을 선언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1년간 가자지구에선 4만명 넘게 목숨을 잃었고, 거의 전체 인구에 달하는 200만명이 피란민이 됐으며, 전체 건물의 66%가 파괴됐다. 특히 유엔에 따르면 가자지구 내 학교의 87%가 공격 피해를 입었다. 지난 365일간 가자지구에 폭격이 없었던 날은 지난해 11월 6일간의 휴전 기간을 제외하면 단 이틀뿐이었다.

도처에 죽음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봉쇄로 식량이 부족해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굶어 죽었다. 이스라엘군의 대피 명령에 따라 피란길에 오른 이들이 길에서 군인들의 발포에 목숨을 잃었다. 일부는 백기를 든 채 총에 맞았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병원과 학교에서, 심지어는 이스라엘군이 안전을 약속했던 ‘인도주의 구역’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식량을 얻기 위해 구호트럭에 몰려든 주민들에게 이스라엘군이 발포하며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생존’에 대한 절박한 요구가, ‘죽음’이라는 답이 되어 돌아왔다.

특히 “가자는 어린이들의 무덤이 됐다”(유니세프)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이들의 피해가 컸다. 국제인권단체 옥스팜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지난 1년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여성·어린이가 지난 20년간 전 세계에서 벌어진 그 어떤 분쟁보다 많았다고 밝혔다.

이전까지는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2016년 이라크에서 여성 2600명이 살해되고 시리아 내전 첫 2~3년간 한 해 평균 어린이 4700명이 살해된 것이 최고치였으나, 가자지구 희생자 수치는 이런 비극의 기록까지 뛰어넘었다. 채 1년이 안 되는 기간 여성 6297명, 어린이 1만1355명(8월31일 기준)이 목숨을 잃었다.

통상 무장세력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연령대로 여겨지는 18~59세 성인 남성 사망자의 비율은 전체의 40%였다. 이들 전체를 하마스 무장대원이라고 간주하더라도 나머지 최소 60%는 어린이, 여성, 노인 등 민간인이었다는 의미다. “이번 전쟁은 역대 그 어느 전쟁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적은 전쟁”이라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주장과 배치되는 대목이다.

넓어지는 전선, 출구 없는 전쟁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민간인 피해에도 휴전은커녕 전선이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거듭된 압박과 경고에도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겨냥해 지난달 23일부터 레바논 전역에 강도 높은 공습을 이어가는 한편, 지난 1일부턴 아예 국경을 넘어 18년 만에 남부에서 지상전을 시작했다.

단 2주간 공습으로 레바논에서 14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100만명 이상이 피란길에 올랐고, 3100개의 건물이 폭격에 무너졌다. 영국 분쟁감시단체 에어워즈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이 가자지구를 제외하면 지난 20년 새 세계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공습이었다고 밝혔다. 레바논 영토의 3.5% 크기에 불과한 가자지구에선 지난해 전쟁 발발 후 첫 2주간 4000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

개전 이후 꾸준히 우려가 나왔던 ‘5차 중동전쟁’의 불씨도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저항의 축’의 주축인 이란과 이스라엘이 정면충돌한다면 중동 전체가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

전쟁을 끝낼 출구 전략 역시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국제사회가 1년 내내 휴전 목소리를 높여 왔으나 최대 지원국 미국의 요구도 번번이 무시해온 네타냐후 총리의 강경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견으로 종전 후 가자지구를 누가 통치할지 전후 계획조차 전쟁 1년이 되도록 마련되지 못했다.

미국이 제시해온 ‘두 국가 해법’이 이스라엘의 거부로 요원한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스라엘군이 가자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강화될 공산이 크다. 이는 이스라엘군이 당장은 하마스를 무력화시킨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을 남길 수 있다. 결국 전쟁을 ‘어떻게’ 끝내느냐에 76년간 이어진 해묵은 분쟁을 종식할 것인지, 또다시 비극을 되풀이할 것인지 달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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