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에 동원 젊은 장병들
또 희생양이 될 뻔했다
이 사태를 모의한 수뇌부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부 수립 이래 가장 길었던 계엄은 1979년 10월27일부터 440일간 지속된 비상계엄이다. 신군부 세력의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계엄은 5·18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과거처럼 보였던 ‘역사’가 ‘현실’로 들어온 것은 지난 4월 44년 만에 5·18 당시 계엄군 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를 취재하면서다. 여전히 일상에서 계엄의 시대를 지우지 못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계엄군 여럿에게 강간을 당한 피해자는 아직도 계엄군이 입고 있던 얼룩무늬 군복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그때 맡았던 술 냄새, 땀 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맡으면 구토한다고 했다.
1981년 해제됐던 계엄령이 2024년 다시 선포됐다. 스웨덴에서 열릴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을 일주일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은 광주의 상처를 들춰냈고 ‘친위쿠데타’나 다름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 했다.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한 계엄군에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투입됐던 부대인 육군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이 포함됐다는 건 징후적이다. 계엄군은 헬기를 타고 나타나 국회 본관 창문을 깨고 강제 진입했고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2021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1980년 제7공수여단에 복무한 대대본부 및 33대대 소속 중 199명에게 “고통스러웠던 경험에 대한 잘잘못을 묻고자 하는 게 아니라 당시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이나 증언을 듣고 싶다”는 서한을 보냈고 진술조사 참여를 요청했다. 114명이 조사를 거부했지만 29명은 진술에 응했다. 당시 조사위가 받은 계엄군의 편지 일부를 소개한다. “회상해보면 과거 정치군인들의 욕망에 애꿎은 부하 장병들의 희생만 강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어느덧 40년이 지났지만 5월이 오면 마음 한구석이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광주 5·18 묘역에 가서 진심으로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2024년 계엄군으로 동원된 젊은 장병들이 하마터면 또 희생양이 될 뻔했다. 분명히 밝혀야 한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 박안수 계엄사령관을 비롯해 이 사태를 모의하고 부대 출동을 명령한 책임자들을 밝혀내는 것이다. 젊은 군인들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포고령에 따라 국회 결의를 막으려 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젊은 군인들을 희생양 삼으려 했던 수뇌부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지난해 12월 조사위가 5·18 당시 성폭력 피해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사위원 9명 중 국민의힘 추천 위원인 이종협·이동욱·차기환 위원은 100쪽에 달하는 소수의견을 작성했다. 요점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추정만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히게 하는 보고서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40여년이 지나 진상규명을 하는 것도 피해자들에게 미안해할 일인데 그들은 오래 지나 증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입증 책임’을 강조하며 형사재판이 아닌 행정기구로서 조사위의 기능을 부정했다. 그들은 조사위가 국군의 명예를 훼손한다 했고 국가폭력 대신 ‘과도한 공권력 행사’라는 용어로 잘못을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진 자들이 ‘1980년 광주’를 역사로 남기지 못하고 ‘2024년 계엄’으로 불러들인 것은 아닐까.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5·18 당시 성폭력 피해자 이남순씨는 ‘계엄 호외’를 읽고 말했다. “계엄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호외를 읽고 재밌었어요. 대통령이 국민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고 했나봐요.” 그의 반어법대로 이 사태가 희극으로 끝나려면 시민들의 ‘행위’가 중요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잔혹하거나 온화한, 야만적이면서 때로는 숭고한 사람의 행위”(<소년이 온다> 영문판 서문 중) 말이다.
물리적 충돌은 벌어졌지만 인명 희생까지는 없었다는 점에서 1980년 광주의 상처가 우리를 성숙하게 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것이 역사의 발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5·18 광주의 진상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고 발포명령을 내린 자도 처벌하지 못했다. 2024년에는 명명백백하게 처벌하고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 1980년과 2024년은 그렇게 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