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계가 아냐" 전태일 외침…시대를 흔든 '불' 됐다[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㉘]

2025-09-08

대한민국 '트리거 60' ㉘ 전태일과 노동운동

매일 아침, 나는 서울 청계천 전태일기념관의 문을 열며 오빠를 만난다. 유리장 속 웃음, 손때 묻은 유품, 삐뚤빼뚤한 글씨가 55년 전의 그날을 증언한다. 그는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처럼 다가온다. 전시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지는 질문이다.

오빠의 시간은 대구시 남산동에서 시작됐다. 1948년 그 집에서 태어난 오빠는 잠시 따뜻한 가족의 품을 누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생활고는 장남이던 오빠를 너무 일찍 어른으로 만들었다. 청소년이 되기도 전에 평화시장 ‘시다’가 됐고, 어린 어깨 위로 시대의 가난이 얹혔다. 70년 11월 12일, 오빠가 집을 나서던 마지막 아침이 지금도 선명하다. 야간중학교 월사금 150원을 채우지 못해 조바심이 난 나는 “돈을 언제 줄 거냐”고 재촉했다. 오빠는 웃으며 “며칠만 기다려, 다 해결해 줄게”라고 했다.

그날 밤, 오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뒤늦게 읽은 오빠의 일기에는 “나는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내가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저를 다 바치오니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라는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오빠에게 철없는 부탁을 한 나는 오래도록 미안함을 안고 살아야 했다.

당시 평화시장의 일상은 참혹했다. 환기도, 조명도 부족한 다락방 같은 작업장. 평균 나이 열다섯의 미싱공들은 하루 14~16시간을 버텨야 했다. 월급은 고작 커피 두 잔 값에 불과했다. 좁은 통로는 재단천에서 나는 기름 냄새로 가득했고, 환풍기가 없어 먼지와 실밥이 그대로 폐로 들어갔다. 바늘에 찔려 피를 흘리거나 눈이 상하는 일은 흔했지만, 제대로 치료받기는 어려웠다. 당시 신문 기사에도 “밤새 창문 없는 다락방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울린다”는 증언이 실렸다.

시대를 흔든 ‘프로메테우스의 불’

1960~70년대 한국은 수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추진했다. 봉제·섬유·가발 등 노동집약형 산업이 국가 성장의 토대가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수많은 여공과 청소년 노동자의 건강과 청춘이 희생됐다. 노동청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감독관은 대기업 공장에만 머물렀다. 작은 봉제공장은 “감독 대상이 아니다”며 사실상 법의 바깥에 존재했다.

70년 11월 13일, 스물두 살 청년 재단사는 평화시장 입구에서 몸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의 외침은 대학가와 성당, 공장으로 번졌다. 일부 언론은 “생활고의 비극”으로 축소했지만, 영안실에 모여든 사람들의 눈물과 분노는 노동현장으로 향했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생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당시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시민운동가 장기표는 “전태일 이후 학생운동의 길이 달라졌다”고 회고했다. 추상적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의 노동 문제와 민중의 삶을 마주하는 전환점이었다.

학생운동은 방향을 틀었다. 그동안 대학가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천착했지만, 전태일의 죽음 이후 학생들의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로 바뀌었다.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여공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고, 전국 각지에 노동야학을 세웠다.

전태일은 종교·법조·문화계 등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문익환 목사는 그를 ‘우리 시대의 예언자’ ‘불법을 세상에 외친 순교자’라고 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전국적인 미사를 열었다.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의 수기와 유서, 동료들의 증언을 모아 『전태일 평전』을 집필했다. 억눌린 목소리를 복원하고 새로운 사회적 의제를 제시한 선언이었다.

시인 김지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 노래했고, 백낙청은 ‘보살행’으로 해석했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같은 노동가요는 그의 불꽃과 연결된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냈다. YMCA·YWCA·여성단체들은 노동자 무료 진료소와 야학을 지원했다. 일본 노동운동가들과 미국·유럽의 인권단체들이 전태일 사건을 성명으로 발표했고, 국제노동기구(ILO) 회의에서도 한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의제로 다뤄졌다.

전태일의 불꽃은 단지 한 청년의 분노가 아니라 제도적 변화의 시작이었다. 70년대 후반 근로감독관 확충, 여성·청소년 노동자 보호 강화가 이어졌고, 81년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초기 법은 현장의 위험을 충분히 담지 못해 ‘실효성 없는 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전국의 공장 노동자들은 대투쟁에 나섰다. 2700여 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근로기준법 준수와 단체교섭권 보장을 요구했다. 이 결과 주 44시간제가 도입됐고, 88년 최저임금제가 시행됐다. 하지만 사용자 측의 반발과 정부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제도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90년대 파견근로자보호법은 오히려 ‘합법적 비정규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2000년대 근로기준법 전면 개정, 모성보호 강화 등 진전도 있었지만, 정책 후퇴와 노사 갈등은 반복됐다.

오늘의 현실은 어디까지 왔는가. 2024년에도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쿠팡 덕평 물류센터 화재,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청년의 죽음, SPC 제빵공장의 끼임 사고, 포스코ENC 건설현장의 추락사. 배달 라이더들의 죽음, 사건의 이름은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안전보다 비용이 앞서고, 책임은 외주와 하청으로 전가된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 “열사 아닌 동지”

플랫폼 노동자는 앱 호출과 평점에 종속되지만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로 묶여 산재 보상에서 배제된다. 배달노동자는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건당 수수료’를 위해 달려야 한다. 이주노동자는 체불과 재해를 반복해서 겪는다.

주 5일제가 도입되고 최저임금이 매년 인상됐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다”이다. 노조 조직률은 여전히 14% 안팎에 머물고,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취업자의 30%를 웃돈다. 노동자 다수는 ‘노조의 울타리’ 바깥에 서 있다. 일부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는 사회적 신뢰를 흔들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내국인과 이주노동자의 격차는 더 깊어졌다. 오빠가 꿈꾸었던 ‘모든 노동자의 권리’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나는 오빠를 단지 ‘분신한 열사’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이소선 어머니께서는 “열사 말고 동지로 불러 달라”고 하셨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하루 종일 마음이 우울하다”며 늘 약자를 먼저 챙겼다.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해주려 애썼고, 구두닦이나 행상 아이에게 따뜻한 밥을 사주었다. 배고픈 동료 소녀들에게 풀빵을 나누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은 넉넉했고, 사랑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선택으로 “사람답게 일할 권리”를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나는 노동사회학을 공부했고, 영국에서 학위를 마친 뒤 연구와 교육, 정치 활동을 거쳐 지금 전태일기념관을 지키고 있다. 젊은이들은 전태일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 SNS에 웃는 얼굴을 올린다. 오빠의 정신이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소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오빠와 어머니의 삶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 무겁지 않느냐”고. 그러나 나는 무겁지 않다. 그의 불꽃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노동권의 보편화, 안전한 일터, 노동 존중 문화. 그 과제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내국인·이주노동자, 플랫폼·하청 노동자 모두를 아우르는 제도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변화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장은 고개를 젓는다. 변화는 선언이 아니라 변화를 굴리는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에서 비롯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결국 사람에게 있다. 오빠 전태일은 말했다.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힘에 겨워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그가 맡긴 덩이는 여전히 무겁다. 그러나 함께 굴린다면 그 무게는 희망이 된다. “나는 사람이다. 당신도 사람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이 단순한 진실 앞에서 ‘K노동’이 세계의 기준이 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강남개발과 아파트’ 편입니다.

전순옥 전태일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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