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
〈제4부〉스파이 잡기 30년, 하동환 전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의 비망록
9화. “청와대 송전망 마비 준비” 北이 심은 스파이 매뉴얼

청와대를 비롯한 주요 통치기관들에 대한 송전선망 체계 자료를 입수하며 이를 마비시키기 위한 준비사업을 예견성 있게 갖추어 나가며 경기도 화성, 평택 지역의 해군2함대사령부, 평택화력, LNG저장탱크시설, 평택 부두의 배치도와 같은 비밀자료들을 정상적으로 수집 장악해 유사시에 대비한 준비를 갖추어 나갔으면 합니다.(2019년 1월 24일)
북한 공작원은 민주노총 기획국장과 교육국장으로 활동하던 석모(55)씨에게 지속적으로 청와대 송전망과 평택 LNG저장 시설과 같은 국가 기간 시설 자료를 요구한다. 유사시 전력 체계를 마비시켜 국가 지휘 체계를 무너뜨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지령이 내려온 시점은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한 지 엿새 뒤였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우리 정부도 북·미가 모두 당시 회담에 만족한다는 점을 전하며 덩달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실무 회담에 한국도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해 7월에는 “반일 감정과 일본 기업 배척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소기업들과 자영업자, 지방자치단체들을 적극 발동시켜라”는 지령문이 내려왔다. “일장기 화형식, 일본인 퇴출 운동, 대사관·영사관에 대한 기습 시위를 비롯해 파격적인 반일 운동을 적극 벌이라”고 주문했다. 일본 정부가 먼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를 시행해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시작되고 있던 시기였다. 북한의 지령은 전국 조직을 가진 민주노총을 통해 반일 감정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물리적인 테러로 이어질 듯한 북한의 지령은 2013년 8월 혁명조직(RO) 사건 당시의 형국과 닮았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를 통해 산업통상자원부에 전력 공급 중단 시 대응 체계 내용이 담긴 자료를 요구했다. 그는 그해 5월 서울 마포의 한 수도원에서 열린 비밀 회합에서 “철탑을 파괴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며 “정말 보이지 않는 곳에 엄청난 폭발을 시켜놔도 마비가 되는 그야말로 쟤(남측)들이 보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RO 1심 재판 당시 한국전력공사의 송전팀장은 법원에 출석해 북한에 송전망 정보가 노출된 것에 대해 아래와 같이 우려했다.

RO 사건 이후 주요 시설을 관리하는 공공기관들은 군부대와 함께 경비를 강화했다. 한국석유공사는 평택시에 73만㎡(약 22만 평) 규모에 620만 배럴을 저장할 수 있는 액화석유가스(LNG) 저장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2013년 군부대 주재로 대테러 대비 대책을 실시했다. 2016년 3월 출범한 해군·해병대 신속 기동 부대는 그해 6월 평택 LNG 기지에서 첫 테러 진압 훈련을 하기도 했다.
민주노총과 RO 사건을 모두 수사했던 하동환 전 대공수사단장은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효과적으로 마비시킬지 세밀하게 준비하는 모습은 2013년이나 2019년이나 똑같다”며 “북한이 통합진보당이라는 숙주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역시 전국 조직으로 유사시 활용 가능성이 높은 민주노총을 고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은 주요 시설 송전망 체계도를 확보하기 위해 석씨에게 민주노총 산하 건설산업연맹 조합원까지 포섭하라는 지령을 아래와 같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