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에 강하다’ 천하장사 출신 첫 대한씨름협회 회장 이준희 “경기장에 가면 잔소리 많다고 싫어해요”

2025-06-24

세 번의 천하장사(1984·1985·1987) 제패, 그리고 7차례 백두장사에 오른 씨름 레전드 이준희(68)는 이만기, 이봉걸과 함께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주역으로 추억된다. 현역 시절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었다. 모래판 위에서는 차갑게 보일 만큼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천하장사에 올라도 세리머니가 크지 않았다. 당시 1m88의 큰 키에 뛰어난 개인 기술, 트레이드 마크였던 곱슬머리와 차분한 분위기, 그리고 매너까지 갖췄던 이준희는 그래서 ‘모래판의 신사’로 불렸다. 당시 전국구 스타인 이만기와 정반대의 스타일이면서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사랑받았다.

지난 1월부터 제44대 대한씨름협회 회장으로 뛰는 이준희의 행보에도 이런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빠르거나 화려한 변화의 보폭은 아니지만 기본과 디테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취임 6개월을 보낸 이준희 신임 회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뭘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바쁘게 시간이 흘러갔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고 했다. 대회장을 빠짐없이 챙기는 타이트한 일정에 세심함이 녹아 있다.

최초의 천하장사 출신 협회 수장으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는 현장을 지키며 대회 진행까지 꼼꼼히 살피는 걸로 유명하다. 이 회장은 “새 회장으로 일단 대회 분위기를 잡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회 진행이나 절차에 문제가 없어야 선수들에게 피해가 없다. 우리가 현장에서 조금만 더 신경쓰고 집중하면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가 경기장에 있으면 잔소리 한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며 웃었다.

초·중·고 등 아마추어 팀에 대회마다 상금을 주기로 한 것도 신임 회장이 취임과 함께 생긴 변화다. 상금 규모가 10~30만원 수준으로 크지는 않지만 선수들에겐 긍정적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녹아 있다. 생활체육으로서 씨름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 역시 이 회장이 힘을 주는 부분이다. 협회는 지난해 11월에 연 대장사씨름을 6월초로 앞당겨 경남 창녕에서 개최했다. 4월 전남 구례에서 열린 전국생활체육대축전에 이어 2개월 만에 동호인 대회를 열면서 호응이 좋다. 동호인 뜻에 귀 기울이겠다는 이 회장은 “씨름을 즐기는 동호인들이 늘어나면 그게 씨름 발전에 동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선수와 지도자 등을 거친 뒤 민속씨름 경기위원장, 대한씨름협회 경기운영총괄본부장 등 행정가 커리어까지 밟아오며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다. 기대가 높은 만큼 그의 어깨도 무겁다.

씨름은 한때 국민 스포츠로 인기를 누렸던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화려했던 시간과 멀어져 있다. 누구나 떠올릴 만한 씨름 스타는 지금까지도 이 회장이 활약한 1980~1990년대에서 멈춰 있다. 2010년대 중반 씨름 인기가 깜짝 반등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이 회장은 “‘이거다’ 하는 도약 계기가 안 만들어진다”고 현실을 답답해 했다.

현대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다. 그러나 씨름은 아직 현대 스포츠로서 몸집을 키우지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은 “씨름의 스포츠적 레벨을 끌어올려야 한다. 지금도 스타성이 충분한 선수들이 많지만 팬들에게 어필이 잘 되지 않는다. 선수와 협회, 팀들이 함께 고민하며 씨름만의 매력적인 콘텐츠를 찾아야 한다. 김민재, 노범수 등 젊은 스타들도 조금 더 분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장은 씨름계 전반의 현실적 어려움도 털어놓으면서 아마추어 수준에 머무는 협회의 역할에도 변화를 예고했다. 그 연장선에서 1년에 9차례 열리는 민속씨름을 조금더 차별화시킨 대회로 부각시키려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이 회장은 “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협회 산하에 전문 단체를 만들어 신뢰성을 높이면서 민속씨름을 더 큰 이벤트로 꾸릴 수 있는 전문성을 더할 수 있다면 씨름을 더 매력적인 콘텐츠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뿌리’인 초·중 씨름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사회적으로 초저출산 시대에 돌입하며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유소년 선수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이 회장은 “초등학교 선수들이 줄어들면 더 나아가면 중·고 씨름, 10년 뒤에는 대학과 실업 씨름에도 영향을 준다”고 걱정했다. 요새 초등학교에는 점차 모래판도 사라지는 추세다. 또 씨름인들의 오랜 염원인 씨름 전용 체육관과 씨름 역사 박물관 건립의 실마리도 풀어야 한다.

이 회장의 리더십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른다. 지난 22일 충북 제천에서 개막한 전국씨름선수권 현장에서는 앞으로 4년간 이 회장 체제에서 씨름 발전 밑그림을 그릴 TF팀이 모여 신임 회장이 내건 공약 실천과 2023년 K-씨름 원년을 선언한 문화체육관광부과의 협력 등 각종 사안을 논의했다. 그는 “협회장으로 ‘잘했다’ 평가받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항상 노력하는 회장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 놀지 않겠다. 협회장이라는 자리에 오르면 견제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계속 노력해서 그런 상대에게도 욕을 덜 먹는 회장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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