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몰리가 뒤쫓는 에드워드의 흔적, 동서양의 이상한 역사

2025-04-07

포르투갈 감독으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미겔 고메스의 영화 ‘그랜드 투어’는 언뜻 보면, 그리고 대중 관객들이 보면, 도통 ‘제멋대로인’ 작품처럼 보인다. 이 ‘제멋대로인’ 작품을 두고 칸영화제는 지난해 왜 감독상을 주었으며 예술영화전문 배급사인 M&M은 무슨 용기로 수입을 했고, 그런 거 다 떠나서 미겔 고메스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일까. 그걸 알아내는 과정이야말로 이 영화 ‘그랜드 투어’가 계획한 장대한 여정 같은 것이다.

시놉시스는 엉뚱하고 '괴랄'하다. 단 몇 줄로 요약된다. 당연히 시놉시스와 영화의 전체 톤앤매너는 매우 다르다. 어쨌든 그 몇 줄은 이것이다. 영국인 에드워드(곤칼로 와딩톤)는 버마의 수도 랭군에서 파견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아마도 영사관 직원쯤.) 런던에서 약혼녀인 몰리 싱글턴(크리스타 알파이에타)이 결혼을 위해 찾아온다는 전보를 받는다. 에드워드는 몰리를 피해 줄행랑을 치는데 그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 거처를 옮긴다. 처음엔 싱가폴로 갔다가 다음엔 방콕, 그 다음엔 사이공에서 마닐라로 갔다가 이후 도쿄까지 간다. 에드워드의 마지막 행보는 상하이를 갔다가 장강을 타고 충징으로 가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거기서 다시 티벳(동티벳=킴티벳)을 거쳐 청두로 간다. 그는 여자를 피해 멀리멀리도 도망을 다닌다. 그렇다면 이건 로맨틱 코미디인가. 로드무비 러브 스토리인가.

특이한 것은 영화의 시대 배경이 1918년이라는 것이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한 해밖에 되지 않았고 제국주의의 광풍은 아직 한가운데에 있던 시대 때의 얘기이다. 그런데 더욱더 특이한 것은 에드워드가 다니는 길, 이후 그의 여인인 몰리가 에드워드를 추적하는 길에서 만나는 풍광은 1910년대 후반이 아니라 지금 현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콕으로 가는 기차가 밀림 속에서 탈선사고를 일으키는데 거기서 만난 미지의 여인(나중에 이 여인은 몰리가 만나게 되고 이름은 응옥이다.)의 짐 옆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식이다. 사이공의 거리는 오토바이가 가득 차 흐르고 있고 상하이에는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게다가 영화 속 인물들은 다들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한다. 중간중간의 내레이션은 버마 어이거나 태국어 같은 해당 국가의 언어들이다. 이 모든 건 이상한 중첩이다. 이야기와 언어, 시대와 공간이 중층적이고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인물은 과거에 살고 있지만 그 인물이 다니는 공간은 현재라는 것.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하는가.

에드워드는 도쿄에서 한 고승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림자는 뭔가 숨기는 게 아니라 드러나게 하는 것이오. 일본인들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도망치지 않고 찾아간다오.” 에드워드는 말한다. “제가 말한 그림자는 그것과 다릅니다. 설명이 안 되는 불편한 현상입니다. 자연법칙은 명료하게 설명돼야 하죠.” 고승이 다시 묻는다. “자연법칙은 어디서 배우셨소? 자연법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에드워드는 항변한다. ‘사람은 없는데 그림자만 보이면 보통 사람도 불안해지지요.” 고승은 말한다. “산을 오르시오. 원숭이를 잘 봐요. 큰 나무 아래를 걸어 봐요. 세상에 몸을 맡기시오. 세상이 당신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알게 될 거외다.” 이때의 고승은 처음엔 일본어로 얘기하고 나중에는 포르투갈어로 얘기를 한다. 에드워드의 언어는 시종일관 포르투갈어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영화가 그려내는 선문답의 최고봉이다. 물은 물이되 산은 산이로다, 일까? 이 같은 선문답은 에드워드가 청두에서 만나는 시그레이브 영사(주앙 페드루 베나르)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에드워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국의 종말은 필연적이야. 백인들은 아시아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 

미겔 고메스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제국(서구의 정신과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며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려 했던 지난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인류와 세계, 특히 고승이 말한 대로 일본(동양)인들은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찾아내며, 그렇게 세상에 몸을 맡기면서, 세계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고 순응적으로 ‘세상이 그래도 관대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를 얻었음을 얘기한다. 에드워드는 자연법칙, 일종의 다윈의 법칙을 얘기하지만 시그레이브의 말마따나 그런 법칙을 지닌 제국은 종말이 불가피하며 자신들이 서구의 가치관을 고집하는 한 동양을 이해할 수(지배하거나 교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서구적 가치 철학이 지난 100년간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가르쳐 주는 말(대사)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 ‘그랜드 투어’는 결국 한 서구인의 눈으로 본 지난 100년의 동서양 역사, 그 흔적, 그리고 그것이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의 문제를 남녀의 추적 여행기로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칸영화제가 이 작품에 ‘다소’ 흥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서구 정신의 몰락을 독특한 여행기로 그려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반부에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도망기보다 후반부에 그려지는 몰리의 추적기가 조금 더 리드미컬하다. 몰리가 청두에 이르러서는 명소인 ‘낙산대불’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거의 전부가 흑백이지만 몰리의 에피소드 부분에서는 이상한 채색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영화는 초반부에 버마의 시골에서 회전 대관람차를 인부들이 몸으로 직접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부분과 이후 전통 인형극만이 컬러이다.) 영화는 간간히 컬러 톤을 전체 흑백 화면에 섞어 씀으로써 이 영화가 시공간을 나누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음을 나타낸다. 20세기와 21세기는 과거의 푸티지 화면과 현재의 실사 화면으로 마구 뒤섞인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1918년의 에드워드와 몰리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우리가 머무는 곳은 2025년이고 따라서 그 시대적 이미지는 중첩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의식과 관념의 흐름은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식과 관념을 그리는 영화가 굳이 차곡차곡 색감과 시간, 공간을 나누어서 그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게 바로 미겔 고메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몰리는 응옥(랑케 트 란)과 우정을 나누고 샌더스(클라우디오 다 실바)라는 농장주와 싫어하는 척 점점 그에게 빠지게 된다. 응옥은 점술사인 바동에게 몰리를 데려 가는데, 그녀는 불길한 점을 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몰리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보인다고도 말한다. 몰리는 여행길에 병에 걸리고 샌더스가 치료하지만 점점 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진다. 제국은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면 몰리의 운명도 어느 정도 정해졌다는 것일까. 영화는 점점 기묘한 결론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그랜드 투어’는 결코 쉬운 영화가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도 아니다. 제목은 여행이지만 물리적인 여행길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내용도 아니다. 그보다는 내면과 정신의 여행, 세계 역사가 지나온 흔적과 지금의 모습, 그 미래를 인류학적으로 짚어 낸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결코 흥행에 성공할 수가 없다. 지식인용 영화이다. 영화가 지식인용으로 쓰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붙을 수도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지식인용으로 절대 쓰여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때로 영화는 매우 지적이어야 한다. ‘그랜드 투어’는 때로 그래도 되는 영화 중의 한편이다. 지난 3월 26일에 개봉했다. 전국 14개쯤 분포돼 있는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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