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가 수용한 DJ 속리산 밀서, 그 배신감에 3당 합당 길갔다” [김현철의 YS 비사①]

2024-11-25

시대탐구 1990년대

민주화를 거쳐 1993년 2월 최초의 문민정부가 출범합니다. 김영삼(YS) 대통령의 초기 국정 지지율은 83%(한국갤럽)에 달했지만, 임기 말에는 부정 평가가 74%로 치솟습니다.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에 외환위기까지 터지며 정권을 야당에 넘겨줬습니다. 하지만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지방자치제 실시, 쓰레기종량제 도입, 2002월드컵 유치 등 선진국 기틀을 다진 성과도 있습니다. 극한 갈등으로 치킨게임을 벌이는 정치권도 최근 YS 서거 9주년 추모식에선 한목소리로 “YS 정신 계승"을 다짐했습니다. 답답한 한국 정치의 숨통을 찾기 위해 그의 아들이자 참모였던 김현철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YS 비사’를 연재합니다.

핸철아, 니 소련에 다녀와서 든 생각이 뭔지 아나. 세상이 변했대이. 냉전은 이제 끝난기라.

김영삼(YS)이 옛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모스크바 회담(1990년 3월)을 하기 몇 달 전. YS가 아들 현철에게 말했다. YS는 야당이던 통일민주당 총재 자격으로 89년 6월 소련에 다녀왔다.

언제까지 싸움만 할끼고. 우리가 선진국이 될라카믄 이래선 안 된대이. 앞으로 나갈라카믄 화합해야 된대이.

아버지의 말은 당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손을 잡겠다는 의미였다. 어리둥절했다. 한평생 독재와 싸우며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군부 세력과 손잡으려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YS가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은 냉전의 종식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89년 YS의 첫 번째 소련 방문은 공산권 교류의 효시가 됐고, 이듬해 노태우 정부가 최대 치적인 북방외교의 물꼬를 트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이벤트가 있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민주자유당으로 합치는 ‘3당 합당’을 발표했다. 30년 동안 김대중(DJ)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와 함께 야권의 간판이었던 YS는 여당의 얼굴로 바뀌었다. 당시 심경을 YS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YS의 마음에 자리한 큰 고심은 DJ와의 관계였다. “다음 대선에서 야당은 또다시 분열되고 지역감정은 악화할 것이다. 군부가 계속 집권하면 군정 종식의 시대적 요청은 외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영삼 회고록』) 즉, 자신과 DJ의 분열로 정권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김현철의 회고에 따르면 평생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DJ에 대한 불신이 커진 건 87년 대선 전후다. 그중에서도 88년 ‘DJ 밀서’ 사건이 컸다.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생긴 불신은 YS의 3당 합당 결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때는 88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속리산에 칩거 중이던 YS에게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찾아왔다. 훗날 문민정부의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박 교수의 손에 DJ가 비밀리에 보낸 밀서가 들려 있었다. DJ가 문익환 목사에게, 다시 박 교수를 통해 서한을 전했다. 측근들조차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밀서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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