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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0일 국가 인공지능(AI) 역량 강화 방안을 내놓았지만 그래픽처리장치(GPU) 보유량 격차 등의 열악한 현실을 고려하면 이미 벌어진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엔비디아의 첨단 AI 칩인 ‘H100’ GPU의 한국 보유량은 현재 2000개, 미국의 경우 메타와 MS가 보유한 양만 해도 각 15만 개일 정도다. 게다가 미국과 유럽은 자국 기업의 투자를 바탕으로 AI 주도권을 두고 수백조 원 규모의 자본 싸움에 이미 나선 반면 한국은 아직 GPU 서버 등 산업을 키울 기반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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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국가AI위원회 3차 회의에서 의결된 ‘AI컴퓨팅 인프라 확충을 통한 국가AI역량 강화방안’ 등 3개 안건은 2027년까지 대형 GPU 서버인 ‘국가AI컴퓨팅센터’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 성능의 대규모언어모델(LLM) ‘월드베스트 LLM’ 개발 등 국내 AI 산업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LLM에 이어 2032년까지 1조 원을 투입해 범용인공지능(AGI) 모델을 개발하고 기업·대학 공동 AI 응용 분야 인재 육성기관인 ‘AX(AI 전환)대학원’ 신설, ‘흑백요리사’식 AI 인재 선발 경연대회 ‘글로벌 AI 챌린지’ 개최, 해외 AI 공동연구소 ‘글로벌AI프론티어랩’ 확대 등을 추진한다.
정부는 또 AI 디지털교과서 등 분야별 AI 활용을 위한 선도 프로젝트, AI의 조세특례제한법상 국가전략기술 지정을 통한 세제 지원 강화, 비수도권 데이터센터 부지 관련 규제 완화, AI 연구에 필요한 개인정보 활용 특례 기간 연장, 제조 AI 기업 100개 육성을 포함한 중소기업·스타트업 지원, 3조 원 규모의 AI 집중펀드 조성, 개인정보에 민감한 데이터인 비정형 원본데이터의 개방 확대 등 AI 활용 확대와 규제 완화, 세제 지원 등 범부처 차원의 지원책을 마련했다.
다만 이 같은 지원책이 실효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폭넓은 지원책을 담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재원은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올해 AI 관련 예산은 1조 8000억 원, GPU 3만 장 규모의 국가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 규모도 최대 2조 5000억 원에 그친다. 반면 올해 들어 미국은 5000억 달러(720조 원) 규모의 ‘스타게이트’, 유럽연합(EU)도 2000억 유로(300조 원) 규모의 ‘AI 기가 팩토리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한 초대형 AI 인프라 경쟁을 예고했다. 영국 25조 원, 프랑스 160조 원 등 한국 AI G3 전략의 직접적 경쟁자들도 수십조 원 이상의 인프라 투자를 선언했다.
차이는 민간투자 유치력이다. 정부 예산으로는 부족한 재원을 미국은 오픈AI와 오라클·소프트뱅크에 스타게이트 사업을 맡기고 EU와 영국·프랑스도 규제 완화 등을 통한 민간투자 유치를 늘리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의 ‘글로벌 정부·민간 분야 AI 투자 동향 분석’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 AI 투자 중 민간투자액 비중이 94%로 압도적이었다. 반면 영국의 데이터 분석 미디어 토터스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한국의 민간 투자 지표는 27.7점으로 미국(100점), 중국(88.8점), 사우디아라비아(51.2점), 이스라엘(50.9점) 등에 이어 11위에 그쳤다. 지난해 정부는 2027년까지 65조 원 규모의 민간투자 유치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한국도 AI 예산을 늘리되 오픈AI·구글 같은 빅테크 육성에 정부 지원을 집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를 유도하는 민간투자 유치 활성화 대책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기업 성장을 가로막는 GPU 공급난 해소가 정부가 시급히 나서야 할 단적인 예다. 하정우 네이버 퓨처AI센터장은 “GPU 같은 정부 자원을 단순히 N분의 1로 뿌리는 게 아니라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집중해 빅테크를 키우는 일이 급선무”라며 “정치권이 AI 추가경정예산으로 조(兆) 단위 재원을 얘기하고 있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집행) 속도”라고 말했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빅데이터응용학과 교수도 “기술을 확보한다고 단순히 AI 연구개발(R&D) 예산을 늘릴 게 아니라 스타트업 등 민간투자를 활성화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인재 확보도 문제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통해 AX대학원 신설 등을 내걸었지만 선진국 대비 인건비 격차를 해소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따른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은 10만 명당 3명꼴로 AI 인재가 해외로 유출되는 순유출국으로 분류됐다.
중소기업 지원 역시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중소기업 업계 관계자는 “중소기업 R&D 신규 예산의 50% 이상을 AI 전략기술 분야에 투자·공급한다고 했지만 전체 R&D 예산인 1조 5000억 원 중 대부분은 이전부터 해오던 계속 과제이고 신규 예산은 3301억 원에 불과해 이 중 절반의 예산으로 AI는 물론 양자·바이오·2차전지·우주 등 전략기술 분야에 투자를 할 때 AI 관련 중소기업 육성에 얼마나 효율성이 나올지 의구심이 든다”며 “AI 등 전략기술 분야에 투입할 R&D 예산 규모를 지속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 현장에서 디지털 전환 및 AI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만 중소기업 사정상 비용과 전문 인력 확보 차원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정부가 모든 중소기업에 지원을 할 수 없으니 스마트제조 전문기업을 지정·육성하고 그 기업들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매우 좋은 시도이고 법적 근거까지 명확하게 마련해 체계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