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연합(EU)이 철강을 비롯한 특정 제품군에 대해 재활용 소재의 일정 비율 이상 사용을 의무화하는 규제를 예고함에 따라 국내 철강업계에도 적잖은 파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의무화 비율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전기로 생산 비중이 적은 국내 철강산업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직간접적인 피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유럽집행위원회(EC)가 최근 발표한 5개년 업무계획에는 지속 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 및 에너지 라벨링 규정이 포함됐다. 이 가운데 ESPR은 제품의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탄소중립 및 순환경제를 실현하려는 정책으로, 유럽 역내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소비재 및 중간재에 적용된다. 이미 지난해 7월 발효되었고 EC의 업무계획에 반영되면서 이제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C는 우선적으로 철강, 알루미늄, 섬유, 가구, 타이어, 매트리스 등 6대 제품군을 1차 적용 대상으로 선정했고 이들 제품군에 대해 내구성, 에너지 효율, 재활용 소재 활용 비율 등 구체적인 기술 요건을 담은 위임입법(delegated act) 을 마련해 단계적으로 시행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이 중 철강 부문 관련 규정이 2026년부터 가장 먼저 도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내년부터 실행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과도 무관치 않다. 유럽은 순환경제 패키지(Circular Economy Package)와 같은 정책을 통해 재활용률 제고, 탄소배출 감축, 친환경 제품 사용 촉진에 집중하고 있고, 특히 철강 산업과 관련하여 CBAM과 재활용 소재 사용 의무화 조치를 강행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유럽 내 자원 순환성과 에너지 효율 개선을 유도하는 한편, 유럽 내 산업 보호라는 정책적 목적이 담겨 있다. 이에 따라 한국산 철강 제품도 재활용 비율, 에너지 효율 등의 기준을 충족해야만 수출이 가능하게 되면서 국내 제조사들의 생산체계 및 공급망 전략에 상당한 조정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특히 자동차용 강판, 건설자재용 H형강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유럽에 수출하고 있는 국내 철강사들은 제품별 재활용 원소재 비중 추적, 에너지소비 분석, 친환경 인증 획득 등의 대응체계 마련이 시급해졌다.
한국 철강산업은 수출 비중이 높아 해외 시장의 규제 변화에 민감하다. 우선 당장 내년 유럽의 CBAM 도입으로 인해 탄소집약적 생산 방식의 철강 제품에 대한 관세 부담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한 기술 투자나 친환경 제품 라인 확대가 시도되고 있지만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또한 유럽의 재활용 소재 사용 의무화 조치는 생각보다 빠르게 국내 철강사들이 철스크랩을 활용한 전기로 생산방식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의 전기로 조강 생산비중은 약 30% 수준으로 유럽의 목표치에 비해 낮다. 순환경제 패키지에서는 2030년까지 철강 재활용률 70%를 목표로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턱 없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전기로 생산제품은 주로 봉형강 제품에 집중되어 있어 판재류 수출에 있어서 분명한 제약점이 될 것이다.
유럽이 최대 시장은 아니지만 에너지 및 환경 규제에 가장 앞서 있으면서 글로벌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어서 국내 산업계도 시설 현대화와 재활용 인프라 구축이 시급한 상황이다. 결국 유럽의 재활용 정책은 한국 철강산업에 단기적으로는 비용 증가 압력으로 작용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산업 구조 개편과 친환경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