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쉬운 단죄의 시대에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연극 ‘시련’

2025-04-15

“난 당신을 심판할 수 없어요.”

연극 <시련>을 보고 한 문장을 남기라면 이 대사를 고를만하다. 지난 9일부터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작품은 극작가 아서 밀러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마을을 배경으로 한 마녀사냥의 광풍을 담은 작품은 선과 악이 무엇이며,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공연은 세일럼 마을의 목사 패리스가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딸 베티를 바라보며 시작한다. 이들 옆에 패리스의 조카 애비게일이 불안한 모습으로 서 있다. 목사의 딸이 앓자 청교도를 믿는 마을 사람들은 악마와 계약한 마녀가 마을에 찾아왔다고 의심한다. 구마 의식을 행하는 헤일 목사, 판사 댄포스까지 마을에 찾아온다.

마녀사냥을 주도하는 이들은 애비개일을 포함한 소녀들이다. 이들은 사실 숲속에서 춤을 추고 금지된 장난을 한 것이 들통날까 봐 자신들이 마녀에게 조종당했다고 거짓 증언을 한다. 마녀 찾기에 혈안이 된 도시에서 이들의 한 마디는 권력이 된다. 농부 존 프락터와 그의 부인 앨리자베스 프락터, 마을의 존경을 받는 레베카 너스 부인 등이 마녀의 존재를 의심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마녀를 지목하고 벌주는 행위는 마을 전체로 퍼져나간다. 누군가는 돈을 갚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 이웃을 마녀라고 지목한다. 증거는 필요 없다. 마녀에게 피해 입었다는 진술 하나면 된다. 마녀로 지목된 이들에게는 자신을 마녀라고 인정하고 살 것인지, 마녀는 없다며 끝까지 진실을 주장하다 죽을 것인지 두 가지 선택지가 강요된다.

심판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이 오히려 법관들이라는 점에서 댄포스에게 눈길이 간다. 부정확한 진술과 존재하지 않는 증거에도 피의자를 겁박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재판을 멈추지 않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앨리자베스가 존에게 던지는 “난 당신을 심판할 수 없어요”라는 대사가 오히려 울림을 준다.

희곡은 1692년 세일럼에서 실제로 일어난 마녀사냥을 바탕으로 쓰였다. 근거 없는 의심으로 시작한 마녀사냥의 광풍으로 그해 6월부터 9월에만 20명이 처형 당하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당했다. 아서 밀러는 마녀사냥이라는 소재를 통해 공산주의 색출 운동이 한창이던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기를 비판했다. 1953년 미국에서 초연됐다. 국내에서는 2019년 동국대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초연한 뒤 이번에 6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게 됐다.

극을 이끄는 존 프락터 역은 엄기준과 강필석이 더블 캐스팅됐다. 목사 패리스는 박은석, 댄포스는 남명렬이 연기한다. 사건의 열쇠를 쥔 프락터 집안의 하녀 메어리 워렌은 진지희가 맡았다. 작품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김수로는 권해성과 함께 자기 이익만 챙기는 마을 유지 토마스 푸트넘역을 번갈아 연기한다. 모든 배우의 연기가 안정적이다. 진지희는 메어리 역으로 진지하면서도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2막부터 등장하는 남명렬 배우의 발성과 대사 전달력도 인상적이다. 화려하지 않은 무대 연출은 강박적이고 엄혹한 상황을 오히려 부각시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손쉬운 단죄가 이뤄지는 현시대에 의미가 더 살아나는 작품이다. 신유청 연출은 작품집에서 “나의 반대는 언제나 악이고, 나는 선”인 사회에 “우리가 사는 시대에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의 본질을 비춰내 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공연 시간은 휴식 포함 180분. 오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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