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과 박찬욱

2025-09-11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그의 책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1994년 출간)을 읽게 되면서였다. 할리우드 키드였던 기자는 영화와 그 주변 지식을 빨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다.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은 당시 유일한 물리매체인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접하려 했다. 이른바 ‘희귀 영화’를 보기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많이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서울시내 몇몇 대여점을 훑기도 했다. 그 시절 영화팬들에게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은 숨겨진 좋은 작품들의 리스트를 제공하는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풍부한 영화 지식을 유려한 문체로 풀어낸 글들은 읽는 맛도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된 여러 작품과 감독들이 있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를 묻는다면 <토마토 공격대>(Attack of the Killer Tomatoes·1978), <제3의 기회>(Things Change·1988) 등을 꼽겠다. 불세출의 명작이라서가 아니라, 책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토마토 공격대>는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가는 황당한 B급 코미디였고, <제3의 기회>는 잘 짜인 드라마와 엔딩이 감동적이었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거장이라는 아벨 페라라 감독의 존재도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이사 과정에서 책을 분실했고, 절판된 책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 입맛을 다셨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박찬욱 감독은 2005년 개정 증보판인 <박찬욱의 오마주>를 출간했고, 이 책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다.

영화광이 만든 영화는 어떨까. 책을 보면서 박찬욱의 영화가 궁금했다. 그의 첫 작품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을 뒤늦게 비디오테이프로 봤는데, 범죄극과 멜로가 이상하게 결합된 괴작이었다. 텅 빈 극장에서 홀로 본 그의 두 번째 영화 <3인조>(1997)는 블랙유머가 녹아 있는 범죄극이었다. 당시 한국영화 수준을 생각하면 평균 이상 완성도를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흥행에서도 비평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감독 박찬욱의 좌절을 보면서 영화광은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기 어려운 것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다행히도 그는 세 번째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 재기했고, 복수 3부작 등 작품성을 갖춘 작품들을 계속 내놓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백건대, 그의 영화는 취향에 맞지 않았다. 빈틈없는 미장센, 세련된 음악 등 만듦새는 고급졌지만, 그의 작품에 낙관처럼 찍힌 폭력과 잔인함 등을 견디기 힘들었다.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 위해서라지만, ‘꼭 자르고 썰어야 하나’라고 묻고 싶었다. <올드보이>(2003)의 엔딩을 보면서 몸서리를 쳤는데, 더 충격적 묘사를 하려던 감독을 제작자가 말렸다는 말도 들었다. 2004년 서울극장에서 열린 옴니버스 공포영화 <쓰리, 몬스터>(2004) 기자 시사회 때 “투자자에겐 기쁨을, 관객에겐 고통을”이라고 한 박 감독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2022)을 본 뒤 그가 왜 세계적 거장인지 새삼 깨달았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는 카피처럼 잘 짜인 치정극 같은 전반부가 끝나면 후반부 감정의 만조가 밀려온다. 동네 CGV에서 처음 영화를 본 뒤 지금은 문 닫은 대한극장에서 2차 관람을 했는데, 허투루 넘길 대사와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정훈희의 ‘안개’가 이렇게 멋들어진 노래였나. ‘치정과 멜로의 절묘한 결합’ 따위의 단순한 수사로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감정의 힘을 설명할 수가 없었고, 내 언어의 한계가 아쉬웠다. 박찬욱 최고 걸작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겠지만, 기자는 이 영화를 한국영화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의 12번째 작품 <어쩔수가없다>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지 못했다. 영화제 내내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은 만큼 수상 실패는 의외지만, 전쟁·난민 등 정치적 메시지를 품거나 실험적 연출이 담긴 영화를 선호한 이번 영화제 경향성과 작품 성격이 맞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실망은 이르다. 이 영화의 가치를 평가받을 무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쩔수가없다>는 17일 시작되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으며, 24일 국내 개봉한다. 내년 아카데미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도 선정됐다. 그의 이전 작품보다 대중성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만큼 국내 흥행은 물론 아카데미 수상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에게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을 배운 영화팬으로서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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