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정치는 통치 불능의 무정부 상태에 가깝다. 대통령은 야유의 대상이다. 행정부는 무능하다. 사법부는 신뢰를 잃었다. 여야는 내용 없이 사납기만 하다. 국회는 우리 사회의 중대 문제를 두고 책임 있는 논의를 이끌지 못한다. 삼권의 분립이 아니라 삼권이 동반 추락하고 있는 느낌이다.
정치는 누가 해야 하는가. 가장 본질적인 기준은 정부를 운영하고 통치를 주도할 만한 실력과 자질에 있다. 대중적 인기는 없어도 실력과 자질이 된다면 정부를 책임질 정도의 역할은 한다. 오히려 그런 실력과 자질 없이 대중의 추종을 받는다면 폭정의 주도자가 될 수 있음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대통령이 정부를 운영할 자질도 실력도 없지만 포퓰리스트가 될 실력이나 자질 또한 안 되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를 우습게 봤다. 통치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정치를 너무 우습게 본 대통령
입법·행정·사법 동반 추락 초래
호전적인 민주주의는 위험천만
대화와 타협의 정치 회복해야
정부나 통치를 뜻하는 영어 ‘government’는 아름답고 안전한 항구로 배를 이끄는 것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공동체를 큰 배처럼 생각했다. 항해를 위한 여러 기능을 잘 조율하는 것을 통치라고 여겼다. 그런 통치에 필요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에로스’라고 불렀다. 어떻게 하면 좋은 통치가 가능한지에 관한 실력과 자질을 갖추고 익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슴 뛰는 일로 여겼다는 뜻이다. 통치를 잘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칭송받을 일이다.
오늘날에는 통치를 ‘정부 행위’로 이해한다. 인적 자원과 재정적 자원을 법률과 예산에 따라 효과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개별 구성원들을 사회 공동체로 통합해 내는 정책적·제도적 조치들의 총체가 정부 행위다. 과거처럼 소수의 조언자에 의존해 통치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갖춰야 할 식견과 능력이 훨씬 더 크고 복잡해졌다. 따라서 정부를 책임질 규모 있는 정당을 통해 분야마다 적절한 인적 자원과 지적 능력을 구체화하는 긴 노력과 준비가 중요해졌다.
민주주의는 선출직 정치가들이 여야로 나뉘어 정부의 운영과 통치의 정당성을 두고 경쟁하는 체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인들은 그 일을 감당할 실력을 키우고 자질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을까. 정치하는 일을 사랑하고, 통치하는 일을 가슴 뛰는 활동으로 삼으며, 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고 있을까. 아닌 것 같다. 정치를 대안 없는 싸움으로 몰고 가는 이들이 우리를 지치게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다르게 대표하고 더 넓게 통합하기 위한 윤석열-이재명-조국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한번 분열하고 그들의 배우자를 둘러싼 여성비하적 조롱으로 한번 더 분열하는 마초들의 정치가 우리 앞에 있다. 마음 같아서는 대통령실도 없애고, 국회도 문 닫고, 법정도 폐쇄하고 모두 거리에 나와 끝장을 내고 그만 멈추라 말하고 싶을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좋은 정치와 그러지 말아야 할 나쁜 정치의 여러 사례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나쁜 정치의 사례도 많이 다뤘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스파르테(스파르타)라는 도시 국가가 왜 멸망했는지를 다룬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꼽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회가 오로지 전사의 윤리, 즉 투쟁의 열정에 의해 지배된 것에 있었다. 호전적인 사회는 싸움에 참가하거나 세금을 낼 수 있는 시민들만 우대했고, 여성들에게는 공적 영역에서 평등한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다. 불만을 가진 하층 집단은 화를 냈고, 아내들은 가정에 소홀한 남편을 닦달하며 재산 증식에 열정을 쏟았다.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출산율은 떨어졌다. 인구는 감소하고 국력은 위축되었지만, 불평등을 줄여 시민 수를 늘리는 대신 무작정 돈으로 출산을 장려하기만 했다. 사치는 늘고 시민은 타락했다. 선출직은 돈과 아첨으로 매수되었고, 통치자는 정실인사를 남발했으며, 사람들은 세금 내기를 싫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스파르테는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힘을 유지했으나 전쟁이 끝났을 때는 여가를 선용할 줄 몰라 패망했다.” 그들은 싸움만 했을 뿐 정치를 통해 사회를 평화롭게 운영하는 방법은 익히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인간 사회는 직업과 소득은 물론 학력과 출신 지역, 성별, 세대별 차이로 갈등한다. 그런 차이와 갈등이 적대와 증오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가 가진 주권을 선출직 정치인들에게 위임해 공권력을 운영하게 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적용하는 정부의 통치 기능을 그들에게 맡겨 좀 더 자유롭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길 바랐다. 그런데 그 과업을 맡은 이들이 정치를 하지 않는다. 노사도 교섭을 통해 자본주의를 평화롭게 운영하는 방법을 익혀가고 있는데, 정당과 정치인들이 대화하고 조정하고 타협할 줄을 모른다. 그럴수록 점점 궁금해진다. 그들은 왜, 도대체 왜 정치를 하는걸까.
박상훈 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