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의 핵심은 ‘최근 논란이 법적으로는 문제없다’였다. “(김 여사) 특검법은 사법 작용이 아닌 정치 선동” “제 처를 악마화” “(각종 의혹은) 인정할 수 없고 모략일 뿐”. 이런 항변은 불법성 부인(否認)의 연장선이다. ‘어찌 됐든 사과’를 했지만 구체적 잘못은 적시하지 않았다.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인지부조화의 장면이다. 교통사고 후 ‘미안합니다’를 먼저 말하면 책임 산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경계 심리와도 비슷하다.
이런 태도는 비단 이날 기자회견에서만 노출된 건 아니다. ‘법의 논리’는 윤석열 정부 초기부터 시종일관 작동해 온 기제다. 검사 출신답게 늘 법을 앞세웠다. ‘이권 카르텔’ ‘건폭’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고, ‘불법’과 ‘국기문란’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강조했다. ‘법치’는 대선의 모토였던 ‘공정과 상식’을 구현하는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임기 초 불법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지지율이 올라가기도 했다.
거부권 의존해 특검 공세 방어 급급
물 차는 참호서 버티는 소모전 연상
법의 논리 벗어나 정치력 발휘할 때
배우자 문제 해결에 용기 보여줘야
공격적이던 법의 논리는 배우자 문제 등 정치적 위기를 맞아 어느덧 소극적 방어 수단으로 바뀌고 말았다. 김건희 특검법, 채 상병 특검법 등을 거부하는 명분은 ‘위헌성’이다. 야당이 수사 범위를 줄이고 특검추천권을 제3자(대법원장)에게 부여하는 특검 수정안을 들고 나왔지만 요지부동이다. 거부권으로 무장한 ‘법의 참호’에 자리잡고서 몰려오는 적을 간신히 물리치는 모양새다.
참호전은 방어에 최적화된 전략이다. 방어 수단에 비해 공격 수단이 약할 때 전선을 고착화해 시간을 버는 전법이다. 지지율 10%대 대통령실의 공격 역량은 사실 바닥이다. 법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방어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참호가 언제까지 버텨줄지는 미지수다. 배신자 프레임을 꺼리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일단 야당 안을 거부했지만, 여론의 60% 이상이 특검을 찬성하고 있다. 그렇게 떳떳하다면서 왜 한사코 특검을 마다하는지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야당의 수정안이 여권의 분열을 노린 노림수라는 주장은 틀리지 않겠지만, 여권이 능동적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면 수세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특검 재발의-거부권을 되풀이하는 소모적 정쟁은 국가적으로도 비극이다. 시간은 윤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무엇보다 대통령실은 민심이 돌아선 근본 이유를 되짚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마른 나뭇가지 꺾이듯 툭툭 꺾여 나간 대목마다 어설프고 형식적인 법적 논리 대응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때 ‘따박따박 책임론’으로 정치적 책임을 외면한 것도 그렇지만, 배우자의 명품백 수수나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해서도 법 적용의 형식적 요건을 따지느라 민심을 놓쳤다.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 녹음된 윤 대통령과 명태균씨의 통화가 공개되자 대통령실은 ‘대통령 당선인’이 사인(私人)이어서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당당하게 법치를 표방해 온 권력의 옹색한 방어 논리였다.
윤 대통령의 낮은 인기는 불법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시작된 게 아니다. 스타일의 문제다. 불통과 독선의 이미지가 쌓여 자라난 비호감의 문제다. 법적인 문제라면 고치면 된다. 진통은 있겠지만, 해결되면 입에 쓴 약처럼 몸에 이로울 수 있다. 대통령은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하지만, 법의 좁은 세계에만 안주해서도 안 된다. 지난 2년 반 동안 윤 대통령은 법의 울타리에 갇힌 채 정치를 도외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직도 검사 이미지가 강한 윤 대통령에게 법은 해결책이라기보다 문제에 가깝다.
깊고 좁은 법의 참호를 지키는 것은 결코 윤석열 정부의 활로가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참호전의 대표 사례는 1차대전 때 유럽 서부전선이다. 기관총과 중포(重砲) 등으로 방어력은 세졌지만, 이를 뚫을 만한 전차나 항공기가 제대로 없다 보니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그 결과는 의미 없는 끔찍한 소모전이었다.
정치를 전쟁에 비유하는 건 어폐가 있지만, 윤 대통령이 현재의 대치 국면을 돌파할 무기는 결국 국민의 지지다. 그 지지는 전광판을 보지 않고 그저 열심히 뛰어다닌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속해서 교감하고 반응하는 정치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임기 후반기에 소득·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호감이 누적된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 지금까지의 통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는 환골탈태의 각오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윤 대통령의 남은 2년 반이 성공적일지는 결국 ‘법의 참호’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빠져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의존하는 그 참호는 벌써 한쪽이 무너지고, 물까지 들어차고 있다. 허물어져 가는 참호라도 빠져나오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의 시금석은 배우자 특검 문제 대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