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곁에서 국민의 기본권 든든하게 지키는 게 법원의 임무"
존경하는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법원 가족 여러분!
법원에 있는 동안, 법원을 떠나면서 남긴 동료들의 퇴임사는 저를 뒤돌아보게 하였고 저를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수많은 퇴임사에 담긴 그 순정하고 절실한 회고는 저를 가르쳤습니다.
퇴임의 자리에 서게 된 저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 전 저는 제가 걸어왔고 걸어가는 그 길 위에 늘 누군가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역량만으로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웠던 법관의 길에 함께 해주셨던 분들을 떠올려 봅니다.
따뜻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법관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보여주셨던 선배와 동료 법관들, 재판에 이르는 절차와 과정을 정성을 다하여 살피고 지원해주신 동료 직원들 모두에게 깊은 사랑을 담아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특히 지난 6년간 대법관의 소임을 맡아 일하는 동안 저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고, 흔쾌히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며 지혜와 영감을 주셨던 대법관님들과 재판연구관님들에게 각별한 동료애와 존경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저에겐 법정이 바로 법원이었습니다.
법정에서, 갈등의 파고에 힘겨워 하면서도 억울함, 애증과 애환의 감정을 가슴속 깊이 묻어둔 우리의 이웃들을, 소외와 배제가 아닌 공감과 공존을 절박하게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목소리를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귀담아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재판권한이 주권자인 국민 바로 그들에게서 나왔음을 새겼습니다.
법관이 참으로 성심을 다하여 증거와 법리에 따라 판단하였더라도 그것이 당사자가 온전히 경험하고 기억하는 진실과 동떨어질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저의 재판이 당사자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난 후 겸허함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법정에 서게 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지위에서 마음 속 깊이 묻어 둔 그 어떠한 주장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재판에 이르는 절차와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누려야 할 기본권을 보다 철저하게 보장하는 것이 곧 좋은 재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선배법관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법정은 헌법과 헌법정신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제가 법조인의 길을 가고자 마음먹고 준비하였던 그 무렵, 지금의 87년 헌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되었습니다. 지금의 헌법이 탄생하기까지 국민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헌신이 있었고, 헌법의 기본권 규정 하나 하나에 국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저로서는 재판을 통하여 그 귀중한 헌법의 의미와 정신이 국민들의 일상적 삶에 녹아들어 빛나게 구현될 수 있도록 동료 법관들과 지혜와 경험을 나누고 실천하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법원의 그동안의 꾸준한 노력과 실천으로 '법원은 헌법상 기본권에 근거한 국민의 정당한 주장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곳이고, 그러므로 재판을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이 확인되고 보장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보편적 믿음이 국민들 마음속에 더욱 깊게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법원을 떠납니다.
대법원에서 동료 대법관님들과 함께 고민하여 내린 판단이 그것을 읽고 평가할 누군가의 내면에 닿아 더 큰 영감과 생명력을 얻어가기를, 그리하여 정의의 법이 평등하게 세상에 비추어 우리 사회가 더 평화롭고 아름답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데에 작은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하여 마련된 헌법의 영장제도와 그 제도를 운영하는 법원의 역할이 배제될 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 순간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곁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든든하게 지켜야 할 임무가 바로 우리 법원에 부여되어 있음을 새삼 선명하게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법원의 역할과 이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헌법가치에 기반한 공정하고 충실한 재판을 통하여 꾸준히 쌓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다 함께 노력해서 쌓아온 역사를 잊지 않고 그에 터 잡아 또한 조각 한 조각 쌓아 올려 나아간다는 마음가짐으로, 헌법이 부여한 법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으면 합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늘 묵묵히 법원이 본연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재판업무 수행에 최선을 다해주고 계신 전국의 법관 및 법원 직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경의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존경하는 대법원장님을 중심으로 법원의 모든 구성원들이 법원의 소임을 더욱 훌륭하게 수행하여 주실 것을 믿고 늘 응원하겠습니다.
영예로운 퇴임식을 마련해주신 대법원장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추운 날씨와 연말의 바쁘신 일정에도 귀한 발걸음을 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사랑이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4. 12. 27.
대법관 김 상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