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지워진 성매매 여성들

싱가포르의 도심에서 북쪽으로 꽤 멀리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일본인 추모공원이 있다. 싱가포르에서 매춘업소를 운영해 축재한 일본인 자산가가 자신이 소유하던 고무농원 한구석에 1891년에 1만평 규모로 조성한 일본인 공동묘지이다. 2017년 7월, 여기를 방문한 것은 1877년부터 1920년까지 40여년간 싱가포르 일본인 홍등가에서 젊은 나이에 숨진 여성들의 묘를 찾기 위해서였다.
1905년 기준으로 싱가포르 도심 환락가에 위치한 109개소의 일본인 매춘업소에는 633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있었다. 인접한 중국인 사창가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1900년 전후 동남아시아 식민지 도시에서 매춘에 종사한 일본인 여성은 6000명 정도였다. 당시 일본인 성매매 여성들이 본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한 달러 액수는 당시 메이지 정부의 외화 수입원 순위에서 다섯 번째로 많았다. 그녀들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자발적으로 모금에 나서 상당한 액수의 외화를 본국 정부에 헌금하기도 했다. 일본해군 연합함대의 주력 전함 구입에 사용된 외화 중 일부가 그녀들의 성노동의 대가로 채워졌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혹독한 가난에 정조관념 희박
돈 벌러 동남아에 1만 명 진출
1900년 송금액 외화 수입 5위
신문 사설서 “나라 경영에 도움”
기독교 개입하며 멸시로 반전
일부는 현지 잔류 군 위안부로

그럼에도 그녀들의 존재는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 1880, 90년대에 싱가포르에서 사망한 일본인 여성들의 평균수명은 21세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들의 연령분포가 15세에서 20대 중후반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처했던 환경이 혹독했음을 짐작게 한다. 사인은 성병·풍토병·자살 등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의 인구 이동

1868년부터 일본의 신정부는 열린 바닷길을 이용해 고질적인 인구문제 해결에 나섰다. 하와이나 브라질의 개척농장으로 향하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이민선을 타기 시작했다. 남미·미국·캐나다 등으로 수십만 명이 이주했다. 현지 기준으로는 형편없이 싼 임금이었지만 그래도 일본 국내 노동자보다 7배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태평양 동쪽으로 향한 이민자들이 ‘공식 이민’이었다고 한다면 10년의 시차를 두고 태평양 서쪽 바다로 향한 6000에서 1만 명에 이르는 일본인 성매매 여성들은 ‘비공식 이민’이었다.

남부 규슈의 농어촌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10대, 20대 여성들은 대부분 밀항을 통해 동남아를 비롯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인도·아프리카까지 이동하여 성매매를 했다. 밀항의 과정은 참혹했다. 주로 외국선적의 석탄운반선 밑바닥 석탄 창고에 몸을 숨기는 방식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밀폐된 공간에서 배설물의 악취를 견디며 일주일에서 보름 가까이 견뎌야 하는 과정에서 질식사·아사·병사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상하이·홍콩·싱가포르의 항구에 상륙하면 곧바로 경매가 이루어지고 여성들은 인도 태평양 각지의 홍등가로 흩어졌다. 사이공·싱가포르·페낭·바타비아 같은 항구도시는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 개발이 한창이었고, 중국·인도 등지에서 독신 남성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도시 거주인구 남녀 비율이 10대 1일 때도 있었다. 이에 식민정부들은 공창제를 운영했고, 주기적 성병 검사를 통해 위생관리도 담당했다. 성매매 여성들은 인종·국적에 따라 위계가 나뉘었다. 일본 여성은 백인 여성과 더불어 유럽 출신 부호·군인들이 선호하는 대상이기는 했지만 그녀들이 상대해야 했던 대다수는 중국인·인도인이었다.
그녀들은 왜 밀항까지 하면서 이국의 남성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게 되었을까. 뿌리에는 빈곤과 가부장제가 있었다. 일본이 근대국가로 거듭난 19세기 후반에도 일본의 평균적인 농어촌 민중들은 가난에 짓눌렸다. 기근도 자주 발생했다. 에도시대부터 농촌에서는 고질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솎아내기’라고 하는 영아살해 풍습이 잔존했다. 온전한 노동력을 기대할 수 없는 여아들이 주로 솎아내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여아가 10대가 되면 하녀로 취업하기 위해 도회지로 나가거나 유곽으로 팔려나갔고, 촌락사회에서는 그것을 효행으로 여겼다. 에도막부도 빈곤으로 인한 여성의 인신매매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개항 이후에는 밀항조직과 연계된 인신매매 브로커들이 가난한 농어촌을 돌며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접근한 뒤, 여성의 부모에게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나가사키나 고베의 항구로 데려갔다. 그 외에도 해외의 공장에서 일하게 해준다는 식의 거짓에 속아 넘어간 경우도 있고, 온전히 자발적으로 인신매매단에 몸을 맡긴 경우도 있었다.
국익인가 국욕(國辱)인가

동남아 주요 항구도시에 일본 홍등가가 들어선 것은 대략 1880년대부터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상하이·홍콩 등의 일본영사관은 이들의 밀항을 적극적으로 적발하지 않았다. 동남아 주요 도시에 진출한 여성들과 업소 관계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일본의 경제거점이 형성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사신보 사설(‘인민의 이주와 창부의 해외취업’, 1896년 1월 18일자)에서 “매춘부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이고, 따라서 그녀들의 해외 진출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 이주를 장려하고 해외취업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나라의 경영에도 도움이 된다”라고 역설했다. 그녀들은 ‘국익을 위한 도구’였다. 여론주도층은 그녀들에게 ‘낭자군(娘子軍)’ 즉 여성군대라는 별칭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전통촌락사회에서는 정조관념이 희박했다. 따라서 성매매 여성을 차별하는 관습도 없었다. 에도의 유곽 출신 여성은 남자를 흥겹게 하는 예능까지 겸비한 썩 괜찮은 결혼 상대로 간주되었다. 19세기 후반 일본에 온 서양인들의 눈에는 이러한 사회풍토가 기이하게 비쳤다.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는 서양사회에서 성매매 이력은 해당 여성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초대 주일공사 러더퍼드 올콕은 일본의 매춘부가 일정 기간이 지나서 자유의 몸이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생활을 꾸려나가는 세태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밀항선을 타고 동남아로 향했던 여성들도 당연히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 일상사회에 복귀하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 혹은 문명화는 그녀들에게 또 하나의 혹독한 시련이었다.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는 서양의 성 규범이 일본에 수입되면서 성매매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뒤바뀌었다. 기독교계 여성단체들은 매매춘을 성병 만연의 원흉이자 가정의 평온을 위협하는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특히 일본인 해외성매매를 겨냥해 일본의 국가 체면을 실추시키는 ‘국욕’이라고 질타하고 ‘추업부(醜業婦)’ 또는 ‘천업부(賤業婦)’라는 차별 표현까지 동원하며 해외성매매 여성에 대한 멸시의식을 사회 전반에 보급시켰다. 이들은 해외성매매의 척결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세계 일류국가를 지향하던 일본 정부도 1917년 재외공관에 폐창령을 하달하고 여성들의 국내이송을 결정했다. 러일전쟁 이후 경제 규모가 부쩍 커진 일본에게 해외성매매 여성이 송금하는 외화는 이미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 되어있었다.
국가에 도의는 있는가

생업의 길이 막힌 성매매 여성들은 귀국길에 올랐지만, 일부는 현지에서 인도인·중국인의 첩이 되거나 공사관의 단속이 미치지 않는 오지로 옮겨갔다. 10대의 나이에 이국에서 사망하여 가축 사체 매립장에 묻힌 소녀도 있었는가 하면 저축한 돈으로 고무농장에 투자하거나 직접 매춘업소를 경영한 여성도 있었다. 현지에 잔류한 그녀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동남아에 진출한 일본군이 군 위안소를 만들 때 기꺼이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을 일본에서는 ‘가라유키’라고 부른다. ‘돈 벌러 해외로 나간 여성’이라는 뜻이다. 1970년대에 처음으로 ‘가라유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두 명의 여성활동가가 그렇게 명명했다. 여성활동가들은 당사자들의 증언을 채집하고 지역신문 기사를 조사해서 논픽션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가라유키’라는 용어를 애써 피한 이유는 이 용어가 여성인권의 시각에서만 회자되고 있는 데다 정치적으로도 오염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해외성매매를 배태한 것은 서구제국주의이다. 서구열강이 동남아·하와이·호주에 건설한 식민도시는 저개발국의 독신 남성 노동자를 끌어모았고, 여성 성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뒤따랐다. 그리고 성노동자로서의 그녀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것은 일본의 국가주의이다. 그녀들은 ‘국익’의 선봉이었다가 그 이용가치가 소멸하자 국가의 치욕으로 전락했다. 평생을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결국은 철저히 소외되고만 해외성매매 여성들은 일본 문명화 과정의 첫 희생자였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