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금 우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내란 우두머리와 그 처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아니 비웃듯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고 있고 그 졸개들이 곳곳에서 독을 내 뿜고 있다. 이 역적들이 줄줄이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는 그날 우리는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석 달 가뭄 속의 잉어가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날을 고대하면서 1898만민공동회의 시공간으로 떠나 본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만민공동회와 그 배후 단체인 독립협회에 돈과 물자를 보탰다.
어느 한때의 서울을 살펴보면,
서울 다동에 사는 박씨 부인은 집 판 돈 1백만 원을, 다리 밑 거지는 1원을, 나무장수는 장작 수십 바리를 풍찬노숙 땔감으로, 과일장사는 배 3상자를, 군밤 장수는 군밤 판 돈을(얼마인지 기록이 없음), 빈촌 필운대 사람들은 6원을 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지방에서도 뜨거웠다.
삼화항(三和港, 지금의 진남포)에서는 관과 민이 공동 모금하여 133원을, 인천 시민들은 36원 27전을 보냈다. 과천 사는 어떤 농민이 나무를 한 바리 팔러 서울에 왔다가(아마 오늘날 내란 수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고개마루를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나무판 돈 30냥 가운데서 노잣돈 5냥을 빼고 25냥을 보탰다. 시골에서 서울로 콩나물 팔러 왔던 한 부인은 콩나물 판 돈 전액을 희사했다. 광산노동자와 부두 노동자도 땀 밴 돈을 보탰다.
2025년 오늘날 거리 시위의 특징은 여성들이 많다는 점이다. 무대에도 여인들이 많고 마이크도 여자가 잡고 있고 노래도 여자가 열창하는 경우가 많다. 이게 갑작스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그 기원을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찾을 수 있다. 선각적 여성들 다수가 찬양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앞장섰다. 그뿐더러 인천 기생 9명은 90전을 모아서 보탰다. 그 외 기록에 남지 못한 숱한 여성들이 거리로 나왔고 혹은 집안에서 숨죽여 마음을 태웠다.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키우기 때문에 원초적 감수성이 남다를 것이다.

각급 학교 학생들의 열정이 장하다.
서울의 경우 배재학당을 비롯한 한성사범학교, 무관학교, 영어학교, 한어(漢語, 중국어)학교,일어학교, 법어(法語-프랑스어)학교, 덕어(德語,독일어)학교, 노어(露語-러시아어)학교의 교원과 학도들이 시위를 조직하고 돈을 보탰다. 궁동(宮洞)의 관립소학교 교원, 동현(銅峴) 소학교 학도, 재중원 학도, 양현동(養賢洞) 소학교 학도, 안동(安洞) 소학교 교원도 돈을 냈다. 영어학교 학도들은 10여 원을 냈는데, 그 가운데 4명은 아예 자퇴를 하고 운동에 투신하였다. 10살 안팎의 소년들도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런 소설 같은 일도 있었다.
평안북도 농민 하나가 불원천리 멀다 않고 짚새기를 신고 길을 나선다. 지게에는 명주 두 필이 들어 있다. 서울의 만민공동회를 돕기 위해서였다. 아, 그러나. 고갯길에 올라섰는데 “네 이놈, 게 섰거라. 짐을 내놓거라 당장!” 산적을 만나 명주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다음은 독립신문 기사다.
“농민이 말하기를, 서울에서 애국자들이 풍찬노숙하면서 나랏일을 옳게 하려 한다기에 불원천리하고 이 명주 두 필을 팔아서 보조하렸더니 지금 그대에게 빼앗기고 마니, 다 허사가 되었구료. 그 도적이 그 말을 듣더니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그대들의 말을 들으니 매우 감사하노라. 명주를 돌려줄 테니 어서 빨리 서울 가서 보조도 하고 나랏일을 바로잡아 우리 같은 도적들도 도적질하는 사업을 면케 하라. 우리는 관원들의 학대에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도적질을 하노라.”
(<독립신문> 1898년 11월 18일 자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