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500일’ 1박2일 취재…박정혜 “난 아직 내 할 일을 덜했다”

2025-05-20

500일이 될 줄은 몰랐다. 빨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싸움을 끝내고 싶어서 불탄 공장 옥상으로 올라갔을 뿐이었다.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 박정혜씨(40)는 자신에 대해 “한때 뭣도 모르고 노동자 편이 아닌 사람들 말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동료들이 직원과 경찰에게 밀쳐지는 모습을 보고 “내가 세상을 참 몰랐구나 싶었다.”

정혜씨는 2011년 경북 구미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 입사했다. LG에 액정표시장치(LCD) 편광필름을 납품하는 일본 니토덴코그룹의 한국 자회사다. 2004년 니토덴코의 투자금 200억원으로 시작한 한국옵티칼은 10년 만에 8000억원을 버는 회사로 성장했다. 구미시의 50년 토지 무상 임대와 각종 세금 혜택을 톡톡히 봤다.

회사는 손쉬운 구조조정을 택했다. 2019∼2020년 563명 중 465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냈다. 2022년 12월, 공장에 화재가 나자 니토덴코는 화재보험금 1300억원가량을 수령한 뒤 공장을 아예 닫았다. 노동자를 버려두고 생산 물량만 평택 공장 ‘니토옵티칼’로 이전했다. 두 공장은 일본인 대표이사가 같은(하기와라 미치히로) 니토덴코의 한국 자회사다.

정혜씨는 지난해 1월 8일, 공장 옥상에 스스로를 가뒀다. 노동자를 버려두고 구미 공장을 철수한 일본 그룹 니토덴코에 고용 승계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어느 새 사계절이 지나 21일로 농성 500일을 맞는다. 500일을 열흘 앞둔 지난 11일 경향신문과 굴뚝신문 취재진이 의료진과 동행해 정혜씨와 1박2일 함께 했다. 공장 옥상 농성장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500일이 될 줄은 몰랐다

“‘농성 그만두고 다른 일 찾으라’는 말도 종종 듣죠. 그 말도 맞아요. 근데 이 회사에 내가 너무 많은 애정을 가졌고, 재건할 거라는 기대도 있었는데 이렇게 하니까 너무한 거죠. 저는 불 났을 때 회사 불량 처리해 준다고 LG디스플레이에 파견도 갔어요. 근데 이런 취급이잖아요.”

해고 노동자 7명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투쟁에 돌입했다. 불탄 공장에 남아 숙식을 해결하며 공장 부지를 지켰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회사에 맞서 노조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거점이었다. 부지회장 정혜씨가 조직부장 소현숙씨와 함께 옥상에 오른 것도 그 이유였다.

“미리 계획한 건 아니예요. 원래도 공장 철거 승인 떨어질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날 새벽에 철거하는 아저씨들이 왔더라고요. 여기가 없어져 버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도 잘 안 될 것 같아서, 짐 싸서 다급하게 올라왔죠. 조합원들은 몰랐어요. 옥상에 있는 저를 보고 ‘저 누나 왜 저기 있지’ 할 정도였어요.”

이제는 경찰도 지키지 않는 현장이 됐다. “우리는 오래됐으니까요.” 가벼운 마음도 아니었지만, 500일이나 갈 거라곤 더더욱 생각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목소리 내고 싸우는데 문제가 풀리지 않을까” 했다. 니토덴코는 외면했다. 구미 공장 고용승계 대신 평택 공장에 156명을 신규 채용하는 길을 택했다. 정혜씨는 “우리가 일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목소리 높였는데 그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니토텐코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노동조합원이 싫어서’예요. 확실해요. 우리가 평택공장 가면 거기다 또 (노조) 조직할까봐 더 싫은 거고. 저도 예전엔 일본 기업이 그렇게 노조를 혐오하는지 몰랐어요.”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들은 정혜씨에게 ‘네가 그런 걸(농성) 하고 있다는 너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스스로도 ‘전사’ ‘투쟁가’는 아니었다고 했다. “오히려 좀 부끄럽죠. 노동운동 이런 거 관심 없던 사람이 올라와서 500일 맞았다고 자꾸 ‘투쟁 전사’라는 말 듣는 게요. 다만 뭐라도 해서 이 생활을 끝내고 싶었어요. 내 희생으로라도 끝내보겠다는 생각을 좀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정혜씨는 “500일이 희생이라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지금도 매일 갈등한다. 몸이 상하는 것이 두려운 한편, 500일이나 했는데 그냥 내려갈 순 없다는 생각도 한다. 답이 없으니 하루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 어땠는지 생각하고 내일은 괜찮겠지 해요.”

‘숨이 꽉꽉 막히는’ 여름이 오기 전에

정혜씨가 텐트 안으로 취재진을 들였다. 원래는 현숙씨와 함께 생활하던 자리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 텐트 바닥이 움푹 패였다. 소현숙 조직부장은 476일째인 지난달 27일 먼저 땅을 밟았다. 스트레스로 치아 건강이 악화돼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더 있었더라도 몸이 망가져 여름을 지내기 힘들었을 거라고 정혜씨는 말했다. 이날 오후 5시 기온은 20도였지만 옥상 바닥 온도를 재니 37.4도였다.

“제일 두려운 게 여름이거든요. 텐트 안이 너무 뜨겁고 숨이 꽉꽉 막힌 느낌이어서 진짜 ‘죽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얼음을 안고 있어도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지 않아요.”

현숙씨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정혜씨 마음도 복잡했다. 마음만은 같이 내려가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아있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정혜씨는 덧붙였다. “정말(고공농성을) 여름 전에 끝내게 해 줘야 돼요. 내 몸이 못 따라갈 것 같아.”

동료가 떠난 공간은 허전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 잠을 설쳤다. 최근 신원불명의 남성이 한밤중 지회 사무실에 불쑥 들어왔다. 비바람도 신경 쓰였다. 신경을 긁는 바람소리와 텐트를 바닥부터 밀어올리는 힘이 무섭다.

하루 일상은 늘 비슷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늦어도 아침 7시면 일어나 텐트 안을 정리하고 세수한다. 좁은 옥상을 뱅뱅 돌며 걷고, 꽃에 물을 주고, 뜨개질을 하고, 사람들에게 읽어줄 발언문을 쓰고, 지회 회계업무를 보고, 분리수거를 한다.

옥상 맞은편엔 높다란 아파트숲이 있다. 그 너머에 정혜씨가 살던 아파트가 길 건너 5분 거리에 있다. 그래도 가지 않는다. “싸워야 하는 현실이 있고, 시작했기에 어떻게든 끝은 봐야 한다. 나는 아직 내 할 일을 덜 했다.”

연대하는 동지들이 있기에 힘을 낸다. 이날도 ‘말벌 동지’들은 정혜씨가 보이는 곳에 돗자리를 깔고 쉬었다. 이들은 경기 수원에서, 부산에서 시간이 될 때마다 온다. 고공농성 중인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씨와 한화오션 하청노동자 김형수씨와는 영상 통화를 한다. “내 사업장 투쟁할 때는 바빠서 몰랐어요. 다 연결된 얘기이고 따져보면 거의 같은 문제라는 걸요. 같은 문제라면 서로 힘을 주는 게 맞다 생각하고요. 한결같이 같이 싸워주다 보니까 연대 단위가 더 커지더라고요.”

“‘최장기 고공농성’이란 말이 싫어요”

저녁은 6시반쯤 먹었다. 식사는 지회 사무실에서 도르래를 이용해 옥상으로 올려준다. 식사 후 1시간 정도 옥상에서 걷지만 소화가 다 되는 느낌은 아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고 면역력도 약해지고 있다. 텐트 안에서는 어떤 자세를 취해도 불편하다보니 온몸이 뻐근하다. 자주 스트레칭을 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뭉친 근육들이 다 풀리진 않는다.

정혜씨가 노을이 지는 시간이라고 텐트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해가 지자 맞은편 아파트 수십 가구 창문에 불이 들어왔다. 정혜씨는 “처음에는 맞은편에 사람들이 신경 쓰였지만 이 불빛이 없으면 적막했을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한편 이 빛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라는 감정이 올라와서다.

한 시간여를 걸으니 완전히 어두워졌다. 오후 9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옥상 한쪽에 놓인 세수대야에 생수를 조금 부어 얼굴을 씻었다. 씻은 물은 배수구에 버린다. 남은 비눗물은 변기에 대어놓은 물통을 닦는데 쓴다. 샤워는 엄두내지 못한다. 물이 귀하기에 아껴야 한다. 땀을 닦는 쿨시트로 몸을 닦고 머리는 3일에 한 번씩 감는다. 여름에만 몸을 식히기 위한 용도로 샤워를 했다.

저녁이 되니 추워지기 시작했다. 정혜씨는 여전히 긴 팔을 입고 겨울 이불을 덮고 잔다. 텐트 하나에 의존해서 살기에 날씨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텐트는 비에도, 바람에도, 더위에도 취약하다. 매일 일기예보를 볼 때 바람의 방향과 세기도 본다. 아래에서 위로 치는 바람, 위에서 치는 바람은 다르다. 어떤 바람이 부느냐에 따라 텐트가 찢어질 수도 있다.

혼자 남겨진 최근 새벽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이날은 정혜씨 텐트 밖 1인용 텐트에 2명의 취재진이 각각 잠을 청했다. 침낭에 의존한 5월의 밤은 예상보다 많이 추웠다. ‘집이 곧 텐트’인 생활을 500일이나 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정혜씨는 오랜만에 푹 잤다고 했다. “텐트 밖에 사람들이 있다니 안심이 됐어요.” 안심이 됐다는 말이 무색하게 취재진은 오전 8시 옥상을 내려왔다. 정혜씨가 내려가는 취재진을 배웅했다. 지상에 발을 디뎠을 때 정혜씨는 여전히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내려오지 못했다.

6·3 대선이 코앞이지만 고공농성장의 봄은 여전히 춥다. 정혜씨는 “제일 힘든 것은 앞이 앞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나 소수정당인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 후보, 진보당 김재연 후보가 고공농성 투쟁 사업장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거대 양당 후보들은 농성장에 관심이 없다. 정혜씨는 “외국인투자기업에 많은 혜택을 준 것은 내국인 일자리 때문 아닌가. 정치는 노동자들을 위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정혜씨는 고공농성 기록을 경신하는 중이다. 여성이 500일을 고공농성한 기록은 처음이다. 그는 “최장기 고공농성이라는 말이 너무 싫다”고 했다. “너무 오래 갈 것 같은 느낌이에요. 중요한 건 빨리 끝내야 하는 것인데…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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