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유통기한은···” 국회 수어 통역사, 청와대 시설노동자가 고용불안을 겪는 이유는

2025-03-24

“제 유통기한은 2025년 12월 31일입니다.”

24일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국회 수어 통역사 한은희씨는 프리랜서 노동자인 자신을 이렇게 빗댔다. 국회에 상시 배치돼 기자회견과 정당 대변인 브리핑을 수어로 통역하지만 매년 용역업체의 고용 승계를 기다려야만 하는 불안정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국회는 수어 통역사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다. 매년 나라장터 입찰을 통해 민간 용역업체가 수어 통역사들과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하는 식으로 운영한다. 수어 통역이 청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는 공익성을 갖고 있는데도 ‘직접 고용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한씨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국회 수어 통역사로 일했으나, 지난해 3월 새 용역업체가 고용 승계를 거부하면서 하루아침에 실직했다. 올해 재고용돼 다시 국회에서 일한다. 그는 매일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국회에서 수어 통역을 하고 관리자의 감독을 받지만 프리랜서라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급여도 수여 통역을 한 시간을 분, 초 단위로 계산해 받는다. 대기시간은 급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심지어 용역업체는 수어 통역사를 직원으로 고용하면서 수수료 20%를 떼어간다. 한씨는 “국회에서조차 정보 접근권을 위한 수어 통역사의 안정적인 근로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온전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수많은 공공기관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같은 성격의 일을 하지만 사장(용역업체)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고용 승계를 거부당해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2012년 기획재정부·행정안전부·고용노동부가 마련한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 지침’이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청와대재단 시설관리 용역업체에서 일한 김성호씨는 지난해 말 고용 승계를 거부당했다. 업체에서 고용이 거부된 유일한 경우였다. 김씨는 새 용역업체가 노조위원장 활동 이력을 트집 잡아 고용을 거부한 것 아닌지 의심한다. 그는 지난 21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을 냈다.

정부 보호 지침은 발주기관이 용역업체를 선정할 때 근로조건 보호 관련 확약서 제출 여부 등을 심사하도록 하지만 구속력이 없어 현장에서 쉽게 무력화된다. 용역업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용을 승계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용역계약 기간에 고용을 유지한다’는 등 내용을 계약서에 명시해야 한다. 발주기관은 용역업체가 제출한 근로조건 보호 관련 확약 내용을 이행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업체가 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땐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1~3개월 입찰 참가 자격이 제한된다.

하은성 노무사는 “실제로 용역업체가 ‘고용 승계를 하지 않을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구제신청 또는 소송에서 이긴 사례는 보지 못했다”며 “또 노동자가 고용 승계 기대권을 인정받아 복직하는 경우 용역업체가 부당하게 고용을 거부한 것이라 제재를 받아야 하지만 제재 받은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보호 지침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해 고용 승계 등을 입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영업 양도 시 근로관계가 승계되느냐, 고용이 보장되느냐와 관련된 법 조항이 없고 판례에 맡겨져 있어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며 “‘사업 이전’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법제화해 법적 사각지대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1대 국회에서 ‘사업 이전에서의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이 두 건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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