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의 소리가 좋아 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는 노은주, 소리뿐 아니라 겸손함과,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매사 반듯한 스승의 태도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 노은주는 선생과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여의찮아, 그는 매주 서울과 남원을 올라 다니며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한농선 명창이 강조한 것처럼 아니리나 발림도 중요하나, 판소리는 항상 소리가 중심이어서 그 공력이 묻어나야 한다”라는 가르침, 특히“ 목 재주를 부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잊지 못하고 있다. 노은주가 전하는 한농선 명창의 사생활은 어떠했을까? 역시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선생님은 방이동 아주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셨어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며‘집이 좁거나 작다’라는 등의 불평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매우 검소하셨고 참으로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때로는 선생님의 속옷을 제가 세탁하려고 하면, 야단을 치셨지요. ‘내 지저분한 옷을 왜 네가 하느냐?’라며 절대로 못 하게 하셨어요. 식사는 소식하셨고, 인근에 있는 돈가스 집이나, 현대백화점의 수타 자장면을 별미로 좋아하셨어요. 가끔 백화점에서 립스틱 사는 것이 선생님의 유일한 쇼핑이었는데, 대학생인 저에게도 가끔 하나씩 사주셨지요. 백화점이나 시장을 다녀오신 뒤에, 잔돈이 생기면 5백 원짜리 동전으로 바꾸어서 장롱 안, 저금통에 넣어두시는 것이, 유일한 취미처럼 보였어요.
또 선생님은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나는 부모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으니 잠자다 조용히 혼자 떠나는 게 소원이다.'라는 말씀과 또는 '나는 아파도 너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아픔을 전해 주기도 마음 아프고, 또 너에게 신세를 지며 병원을 찾는 일도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래서 '선생님 왜 그런 쓸데없는 말씀을 하세요'라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이미 선생님은 마음을 내려놓으신 듯한 분이었어요."
노은주의 이야기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모시고 서울 선생님 댁에서 함께 지내고 있을 때인데, 대구에서 공연이 있어 저는 새벽 이른 시간에 내려가 공연을 끝내고 숙소에 늦게 들어왔는데, 밤늦게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아마도 세상을 뜨신 전날 밤이었어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대구 공연은 잘 끝냈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항상 외지에 나가면 몸조심하라는 말씀, 남과 다투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씀, 내일 아침 일찍 오느냐? 등등을 물어보시는 거예요.
다음 날 아침이 밝아, 하얀 신발을 한 켤레 사 가지고 선생님께 가려고 기차를 탔는데, 불길한 예감이 그 순간 엄습해 오는 거예요. 속으로 선생님 돌아가시면 나는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오는 내내 울면서 서울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그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어요. 선생님께서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접한 거예요.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이런 상황에 쓰는 말임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2002년의 일이었으니 벌써 20년도 지난 일이 되었네요. 평소 선생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살고 싶었던 저는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영면(永眠) 소식에 정신을 잃었고, 장례식장에서는 밤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스승, 한농선의 죽음은 그야말로 뜻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큰 슬픔이 노은주에게 닥쳐온 것이다. 선생과 이별한 뒤, 얼마 안 되어 같은 해에 지병을 앓아 오던 그의 모친도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는 것이다. 그 슬픔은 겪어 본 사람들이나 알 수 있는 비극,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의 말이다.
“판소리 공부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토록 닮고 싶었던 선생님도 잃고, 어려서부터 공부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시던 어머니도 저세상으로 보내 드렸는데, 제가 무슨 희망으로 소리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한동안 소리와는 좀 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수록 점차 몸과 마음이 추슬러지면서 위로가 되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리 그 차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벌써 저는 소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판소리를 그만둘 수 없었나 봅니다. 잠시의 방황과 망설임, 그리고 고민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소리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명창 성창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는 2004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농선 선생님의 뒤를 이어서 서울 한신 아파트로 성창순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공부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