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만 보는 식품 대기업 ESG 보고서의 맹점…질소·인·생물다양성은 뒷전

2025-12-19

[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글로벌 식품 대기업들이 내놓는 지속가능성(ESG) 보고서가 기후변화 성과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농업이 초래하는 핵심 환경 피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보고서가 ‘무엇을 측정하고 공개하느냐’가 투자와 규제, 소비자 인식까지 좌우하는 만큼, 현행 ESG 공시가 환경위기의 우선순위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경고다.

덴마크 아르후스대학교 연구진은 학술지 Ecology and Society에 게재한 논문에서 세계 최대 식품회사 51곳의 ESG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기업 보고가 사실상 ‘기후(탄소)’에 쏠려 있으며 질소·인 오염, 생물다양성 손실 등 다른 주요 환경 압력을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분석 틀로 ‘행성 경계(planetary boundaries)’ 개념을 적용했다. 행성 경계는 인류 활동이 지구 시스템을 안전한 범위 안에서 유지하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한계선을 뜻한다. 연구진은 9개 경계 중 상당수가 이미 초과된 것으로 평가되는 가운데, 농업이 그 초과를 밀어 올리는 주요 동인으로 작동해 왔다고 전제했다.

그런데도 기업 보고서에서는 정량 데이터가 사실상 기후 관련 지표에만 집중돼 있었다. 특히 농업과 직결된 ‘생지화학적 순환’—질소·인의 과잉 투입과 유출 문제—은 51개 보고서 전체에서 언급 횟수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니클라스 비트(Witt) 아르후스대 농생태학과 연구진은 “기후가 모든 관심을 끌지만, 질소·인·생물다양성처럼 농업이 가장 크게 한계를 넘어서는 지구 경계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연구는 ESG 보고가 단순한 홍보물이 아니라는 점을 문제의 핵심으로 짚었다. 기업이 ‘무엇을 공개하는지’가 금융과 정책을 움직이는 신호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기업들이 기후 지표만을 중심으로 성과를 제시할 경우, 질소 오염, 물 부족, 생물다양성 붕괴 같은 위기가 악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자본과 정치적 관심이 ‘탄소 중심 해법’으로만 몰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비트 연구진은 이를 ‘탄소 터널 비전(carbon tunnel vision)’이라고 표현하며, 모든 의사결정이 CO₂ 감축에만 수렴할 때 다른 위기가 가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대안으로 ‘행성 물질성(planetary materiality)’이라는 보고 접근법을 제시했다. 기업이 보고 항목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평가된 환경 영향을 기준으로 “지구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부터 측정·공개해야 한다는 취지다. 비트 연구진은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전환을 원한다면, 지구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측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문은 더 근본적인 질문도 던진다. 식품 부문의 ‘가장 큰 주체’들이 정작 ‘가장 큰 환경 피해’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은 채 ‘녹색 전환’의 의미를 정의해버린다면, 농업과 식품 시스템의 미래 방향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설정하게 되는가. 연구진은 보고서가 숫자 나열을 넘어 사회가 지속가능성을 이해하는 방식과 우선순위를 형성한다고 보고, 현재의 공시 관행이 오히려 더 깊은 구조적 변화—농업 투입재, 공급망, 생산 방식의 전환—를 늦출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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