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한국판 장발장’에 무죄

2025-11-27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굶주린 누이의 일곱 조카를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치다 붙잡혀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4차례 탈옥 시도에 형기는 19년으로 늘었다. 중년 나이에 출소 후 잠시 의탁한 성당의 은 식기를 가지고 나오다 경찰에 체포된다. 훔친 물건이 아니라며 은촛대마저 내어주는 미리엘 신부의 자애로 풀려나자 새사람으로 태어나 우여곡절의 인생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선행을 베풀다 숨을 거둔다. 기구한 운명의 출발이 빵 한 덩어리이었다는 점에서 자비, 관용의 중요함을 보여준다.

‘초코파이 절도 사건’의 주인공, ‘한국판 장발장’이 항소심(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물류회사 보안업체 직원인 한국의 장발장은 지난해 1월 사무실 냉장고에서 450원짜리 초코파이와 600원어치 과자·커스터드를 꺼내 먹었다가 절도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섰다. 한국의 장발장은 검찰이 약식명령을 내렸으나 정식재판을 청구해 유무죄를 다퉜다. 1심 재판부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탄식하면서도 벌금 5만원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1심 판결을 수용하면 경비업법상 유죄 전력이 남아 직장을 잃게 된 장발장은 항소했다.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자 검찰은 지난달 30일 결심 공판에서 선고유예를 구형했다. 선고유예는 유죄는 인정되지만 말 그대로 판결을 보류한 뒤 2년 후 없던 일(면소)로 해주는 제도다. 이에 항소심 재판부인 전주지법 형사2부(김도형 부장판사)는 아예 죄가 없다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보안업체 직원들이 야간에 간식을 먹는 관행이 있다는 이유로 절도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법에도 심장이 있음을 보여줬다.

한국의 장발장은 “상호 호의를 기반으로 한 수십 년 관행이 한순간에 범죄가 돼버린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며 재판부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검찰은 대법원 상고 여부에 대해 “판결문을 보고 검토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이다. 이번 사건은 검경의 수사권·기소권 남용의 예로 남을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구속 취소에 대한 즉시항소 포기, 대장동 개발 일당 항소 포기로 홍역을 앓는 검찰이 상고할 경우 어떤 비판이 쏟아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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