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의 몸에도 각인된 ‘부성 본능’…누가 양육의 ‘본능’을 부정하는가

아이를 키우는 아빠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추세다. 한국 통계만 봐도 뚜렷하다. 한국에서 2023년 육아를 이유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남성은 1만6000명으로 1만2000명이었던 2022년보다 37.4% 증가했다. 아이 키우는 아빠에 대한 이미지도 한 세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개선됐다. 육아하는 아빠는 ‘무능하거나 여자 같은 남자’가 아니라 ‘가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 돌봄은 여성에게는 ‘의무’이지만 남성에게는 ‘선택’이다. ‘모성 본능’은 당연시하지만 ‘부성 본능’을 강조하는 사람은 드물다. ‘모성 없는 엄마’와 ‘부성 없는 아빠’ 중 사회적 비난이 집중되는 것은 여성이다.

미국의 저명한 진화인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는 <아버지의 시간>에서 ‘아이 키우는 아빠’들이 증가하는 현상을 단순히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녀를 돌보는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이 남다른 새로운 아버지들은 ‘본성에 반하여’ 마지못해 육아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아버지의 양육 반응은 문화를 넘어 생물학적 차원으로 깊이 들어간다”고 말한다. 남성에게도 ‘양육 본능’이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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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따르면 2억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포유류의 새끼 양육은 거의 전적으로 암컷의 전유물이었다. 7000만년 전 포유류 수컷은 새끼를 데리고 있는 암컷을 보면 그 새끼를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양육 본능은커녕 동족인 어린 생명체를 암컷을 차지하는 데 성가신 방해물쯤으로 여긴 것이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던 남성이 어떻게 양육 본능을 갖게 됐을까. 저자는 인류의 조상인 호미닌이 침팬지나 보노보 같은 유인원들과 마지막으로 공통 조상을 공유한 이후 600만년 동안 변화가 진행됐다고 추정한다. 저자는 특히 플라이스토세(약 258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의 지질 시대)에 발생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기후가 달라졌다. 2000만년 전 미오세 시대 유인원들은 습하고 따뜻한 숲에서 살았다.

500만년 전쯤 기후가 추워지고 건조해지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번식 가능한 성체의 숫자가 크게 감소하면서 인간의 조상은 멸종 직전까지 내몰렸다.

오랫동안 학자들은 인류가 이 위기를 ‘먹이를 찾아오는 사냥꾼 남성’과 ‘새끼를 양육하는 여성’이라는 역할 분리에 의해 극복했다고 설명해왔으나, 이른바 ‘사냥꾼 가설’은 1980년대 후반 설득력을 상실했다. 같은 사냥감을 두고 맹수들과 경쟁해야 했던 플라이스토세의 남성이 날마다 가족을 먹일 만큼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 때 남성 집단은 동물 사냥에 나서고 여성 집단은 과일이나 나물 등을 채집하면서 상호의존하는 생활 형태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는 높은 지능을 바탕으로 상호의존적 공동 양육과 음식 공유 전략을 통해 번성할 수 있었다.” 이런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남을 잘 돕고 관대한 남성일수록 짝을 찾거나 공동체 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협력적 생활 방식은 뇌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성의 대뇌피질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남성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해야 했다. 이러한 성향은 수천수만 년 후 일부 21세기 남성이 의식적으로 ‘멋진’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하는 성향을 만들었다.”

협력이나 양육 보조자 역할보다 남성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가부장주의가 득세한 것은 1만2000년 전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다.

기후가 따뜻해지고 양식과 자원을 축적하는 게 가능해지면서 외부 침입자로부터 농지와 가축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 주된 이유다. “공격적인 남성은 이제 비난받거나 외면당하는 대신 존경받게 되었다.”

저자는 가부장주의가 과학자들의 연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반성한다. 예컨대 과학계는 남성의 돌봄은 유전적으로 아이의 친부인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이 같은 관점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사용됐다.

21세기에는 성평등 의식 확산이나 여성의 경제적 지위 상승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들이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반성을 견인하면서 남성의 양육 본능에 관한 재발견을 촉진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과학계는 친부라는 확신이 남성 돌봄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두 남성으로 이뤄진 동성 커플의 양육을 연구한 심리학자 마이클 램에 따르면 “(동성 부모가) 이성 부모보다 더 높은 수준의 따뜻함, 상호작용, 반응성을 보였으며, 훈육적 공격성은 더 낮았다.”

남성의 양육 본능에 대한 연구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남성의 뇌에 대한 연구는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저자는 아직 규명해야 할 부분이 많다면서도 확신을 갖고 말한다.

“돌봄 반응이 어머니만의 전유물이라는 잘못된 관점을 이제 내려놓아야 할 때다. 모든 남성 안에는 오래전 수컷들에게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성들은 생계를 책임지거나 가부장이 되기 이전에 돌보는 사람이었고, 돌보는 사람이 되기 이전에 보호하는 존재였다. 남성들은 아기들이 발산하는 변화의 힘에 반응할 수 있는 몸과 뇌를 가지고 있었다.”

▼ 정원식 기자 bachwsik@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