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

2025-04-29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사람부터 소, 돼지는 물론 곤충과 개미까지 살기를 바라고 죽기 싫어하는 마음은 다 같은 법이지.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니 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은 동일한 것이네.” 이규보가 남긴 <슬견설>의 한 대목이다. 요새 학생들에게는 ‘이’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교과서에 여러 차례 실려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몽둥이로 개를 때려죽이는 잔인한 광경을 목격하고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육류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사람이 첫머리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 글은 동물권을 강조하거나 채식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도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다짐했다”라고 대꾸하는 화자를 보면 이 작품의 초점이 거기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한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욕감을 느껴 항변하는 상대를 향해 던진 일갈이 위의 인용문이다.

부피감이 작은 파리나 모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잡으면서 큼직한 바퀴벌레를 눌러 죽이기는 꺼려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벌레를 사람과 정을 주고받는 반려동물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하지만 크고 작음은 물론, 이롭고 해로움, 심지어 옳고 그름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교와 대조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판단 역시 자신의 기준에서 그런 것일 뿐이고, 그 기준은 대개 관습과 편견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개와 이는 장자(莊子)의 거대한 붕새와 조그만 메추라기 비유와 연결된다. 9만리 창천으로 날아오르는 붕새를 보며 메추라기는 “쑥대밭 사이만 날아다녀도 이렇게 즐거운데 저 녀석은 대체 뭐하러 저리 높고 멀리 가려는 걸까?”라고 비웃는다. 붕새가 옳은 것도, 메추라기가 옳은 것도 아니다. 장자는, 그리고 이규보는,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의 구별을 넘어설 때 열리는 시야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 절대자유의 소요유(逍遙遊)는 그저 상상에 부칠 뿐이지만, 우리도 ‘원래 그런 것’ ‘절대 안 되는 것’에서 조금 벗어나려 시도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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