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 불어와 나뭇가지를 낭창낭창 흔들어댄다. 짙어진 녹색 나뭇잎은 기름칠한 듯 반짝인다. ‘내 나이를 새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5월 속에 있다.’는 피천득 수필가의 문장처럼 계절은 우리를 위로해 준다. 유년 시절의 일이다. 날아다니는 새가 귀여워 처마 밑에서 참새 새끼를 잡아다 새장 안에 넣고 물도 주고 아까운 싸라기도 주며 정성껏 길러보기로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새는 새장 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니 죽어 있었다. 새를 꺼내 마루에 놓고 손바닥으로 마루판자를 두드리며 ‘일어나라 일어나’하고 주문을 외우며 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머니는 내게 ‘그만저만 해라. 죽은 녀석 고추 만지기인 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내가 어머니에게 속담으로 처음 들었는지는 모르나 속담 1호가 되었다.
어느 교회 집사가 내게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때 나는 나의 첫 신앙은 ‘어머니 종교’ 곧 모교(母敎)였노라고 했다. 집사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어머니는 가정살림에 논농사까지 경작하시며 힘들고 외롭게 사셨다. 나 또한 홀로 성장하며 기댈 곳은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속담으로 내 정신의 뼈대를 튼실하게 해주시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바느질하는 순간에도 나를 옆에 앉게 하시고 속담을 들려주셨다. “남하고 다투지 마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마라 네 눈에서 피눈물 날 수가 있다. 살려고 나온 짐승 죽이지 마라 그것들도 다 생명이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밥 먹고 바로 자면 소 된다. 남에게 손가락질당하지 마라. 병 없고 빚 없으면 산다.”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속담은 속된 이야기가 아니다. 조상들 지혜가 응축되어 구전되어 온 보통사람들의 격언이요 철학이다. 속담을 무식한 사람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F.S 코즈츠이다. 그렇다면 내 어머니는 문학인이었다. 1920년대 출생하여 학교 앞도 가보지 못한 분이요. 마을 야학에서 뒤늦게 한글을 깨쳐 ‘개 조심’ 정도밖에 해득을 못하시는 분으로서 놀라운 일이었다.
‘속담은 평범한 사람들의 철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속담은 하루하루 경험의 어머니가 되어 자녀들의 밥상머리 교육이 되었다. 때로는 잔소리가 되기도 하고 지겹다고도 했다. 귀에 못이 박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잔소리 교육이 약이 되어 오늘날의 수필가 김경희의 삶이 엮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어머니는 어느 대학을 나오셨느냐?’는 내 시집 속 ‘어머니의 시’를 읽어본다. 어머니는 내게 ‘공부 잘해라’ 라든가 ‘출세해서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으셨다. 대신 유유상종이다. ‘못된 녀석들과 어울리지 마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문학으로써의 속담을 장르로 구분한다면 속담과 수필은 이웃이다. 멀다 해도 사촌은 될 것이다. 수필은 청춘의 글보다 한 세상 고비를 넘긴 사람의 글이다. 인생의 향취가 있으면서도 아픈 체험 속 찬란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은 정서적인 글발이다. 수필은 독자의 마음 산책 같은 문장 속에 삶에 대한 의미와 인식을 일깨우는 것으로써, 작가의 삶이 담보가 되어야 신뢰할 수 있다.
동아프리카 속담에 ‘땅에 빚지지 마라. 언젠가 땅이 이자를 요구해 올 것이다.’ 라는 속담 이 있다. 왠 아프리카 속담인가- 어느 지역에서는 산불로 수십 명이 집을 잃었다, 서울에서는 잘 가던 차가 땅 꺼짐으로 도로 밑 땅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봄날의 폭설로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고 한다. 땅이 이자를 요구 햐는 것인가 싶다. 그런데 한 나라의 통치자가 상상할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질러놓고서도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문학적 전공 기술자가 저 모양인가 싶어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녹음 짙어가는 자연 앞에서, 살아갈 날을 위해 새벽 기도하는 분들 앞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그동안 사람들 교도소 보내는 재미로 살아온 인간이나 권력의 꿀을 빨겠다고 쇠파리 떼 같이 빌붙어 살아온 인생들 그리고 우직한 나부터 마음 다스리기 위한 수필이나, 한 편의 속담이라도 제재로 읽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