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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주 금융서비스국(DFS)이 2020년 이스라엘 하포알림은행에 2억 2000만 달러의 벌금을 매긴다고 밝혔다. 3100억 원이 넘는 액수다. 하포알림은행이 고객들의 자산·소득 정보를 은닉해 세금을 탈루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 벌금을 부과한 이유였다. DFS는 뉴욕주 산하 금융감독 기관으로 ‘월가의 저승사자’로 꼽히는 곳이다.
반면 같은 해 금융위원회가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판매 문제를 빚은 우리은행에 부과한 과태료는 197억 원에 불과했다. 하나은행에도 167억 원의 벌금을 매겼다. 당시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를 거쳐 부과한 기관 과태료 중에는 역대 최대 수준이었지만 미국과 같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낮은 액수였다.
되레 금융 당국은 이후 손태승 전 우리금융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이 제기한 DLF 사태 관련 중징계(문책경고) 취소소송에서 잇달아 패소했다. 금융 사고나 내부통제 미흡 적발시 무리하게 최고경영자(CEO)나 임원에 중징계를 부과하고 법인에는 큰 책임을 묻지 않은 결과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미국처럼 법인 중심으로 제재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21일 서울경제신문이 미국 뉴욕주 DFS가 2020년부터 올해까지 내린 제재 조치 결과를 전수조사한 결과 DFS가 동의명령(Consent Order)을 통해 금융사에 부과한 벌금은 평균 4167만 5000달러(약 600억 원)로 집계됐다.
지난해 8월 자금세탁방지(AML) 규정 미흡을 이유로 북유럽 최대 은행인 노르디아은행에 3500만 달러(약 500억 원)의 벌금을 매긴 것이 대표적이다. 2023년에는 신한은행 미국법인(신한아메리카은행)에 내부통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1000만 달러를 부과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와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에 낸 벌금까지 합치면 2500만 달러(약 360억 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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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융 당국이 법인에 매기는 벌금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다. 우리은행이 2022년 라임펀드 불완전판매로 부과받은 과태료는 72억 1000만 원이었다. 같은 해 NH투자증권은 옵티머스 사태로 약 52억 원의 과태료를 물었다. 한상범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는 “법인의 불법행위에 벌금을 무겁게 물리는 쪽으로 감독 정책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은 개인에 대한 제재가 두드러진다. 특히 불완전판매 같은 내부통제 사고가 발생할 경우 CEO를 비롯한 고위 임원급은 어김없이 처벌 대상이 된다. 금융 당국이 올해부터 본격 도입한 책무구조도도 인적 제재 위주의 감독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분석도 있다. 책무구조도는 금융회사 내 주요 업무의 최종 책임자를 미리 정해두는 제도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책무구조도가 도입된 것은 각 임직원의 내부통제 책무를 명시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한다는 취지 때문”이라면서도 “결국은 CEO에 대한 당국의 압박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고 짚었다.
금융계에서는 ‘금융사 사고 발생→CEO 중징계→CEO 불복 소송’ 패턴이 굳어진 지 오래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최근에는 전·현직 금융지주 회장들과 금융사 CEO들이 금융 당국을 상대로 연이어 이기기도 했다. 정영채 전 NH투자증권 대표는 금융위를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낸 문책경고 처분 취소소송 1심에서 이달 6일 승소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라임펀드 불완전판매 문제로 직무정지 처분을 받았던 박정림 전 KB증권 대표가 금융위를 상대로 1심 승소하기도 했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윤종규 전 KB금융 회장은 2004년 국민은행 부행장 시절 국민카드 합병 관련 회계 처리 문제로 문책경고를 받고 사임했다가 10여 년 뒤인 대법원에서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황영기 전 KB금융 회장도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문제가 된 파생상품 투자 손실과 관련해 2009년 당국의 중징계를 받았다가 2013년 대법원에서 승소하며 명예를 회복했다. 박동창 전 KB금융지주 부사장은 의결권 자문사인 ISS에 내부 정보를 유출했다는 이유로 감봉 3개월 처분을 받았지만 이후 2015년 대법원에서 징계 취소소송 확정 판결을 받았다.
CEO 제재 위주로 감독을 운영하다 보니 감경 논란도 불거진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는 “내부통제 이슈에 대해서는 개인이 아닌 조직을 처벌하는 것이 맞다”며 “현재 제도 자체가 CEO에 책임을 물리는 쪽으로 설계돼 있는데 금융기관에 대한 벌금 강화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법체계를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