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흔적 찾아
1937년 舊 소련서 카자흐 이송
토굴 파고 강추위 견디며 개척
“물 없는 땅에서도 살아남는 고려인”
소련 정부 ‘영웅 노동자’ 훈장 휩쓸기도
“자식 교육 열정적” 사회적 성공사례 많아
韓·카자흐 교류 뒤 강제 이주 수면 위로
민족 정체성 찾기 여정 계속
고려인 3세, K문화 열풍에 韓 관심 늘어
국립 고려극장엔 춘향·심청전 연극 성황
“고려인이 그렇듯 韓도 고려인 잊지 말아야”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 북쪽으로 350㎞를 달렸다. 도로는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지평선과 평행하게 놓여 있었다. 눈이 내린 데다 도로포장 상태가 군데군데 좋지 않아 4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인구 2만명의 소도시 우슈토베로, 80여년 전 강제이주의 비극을 겪은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다. 한겨울엔 영하 3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추운 지역이다. 귓가를 때리는 칼바람이 차가웠다.
우슈토베역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10㎞ 향하면 바스토베 언덕을 만날 수 있다. 지난달 15일 찾은 바스토베 언덕에는 1997년 고려인들이 강제이주의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세운 표지석이 남아 있었다. 표지석에는 ‘이곳은 원동(공산권에서 ‘극동’을 일컫는 말)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9일부터 1938년 4월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바스토베 언덕 중턱에 오르니, 수풀이‘ 무성하고 일부가 허물어진 봉분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금속판에 정으로 새긴 ‘별세 9/1-1959년’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고려인 1세대가 묻혀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눈 덮인 언덕 꼭대기에 오르니, 갈대밭 사이로 오래전 고려인들에 의해 개척됐을 논밭들의 경계가 선명하게 보였다.
고려인들이 이곳에서 터를 잡은 것은 1937년이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들은 당시 소비에트연방(소련) 중앙정부의 결정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그해 9월 열차에 타야 했다. 고려인 17만명이 한 달 꼬박 6600㎞를 횡단해 열차에서 내린 곳이 우슈토베였다. 고려인들은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 언덕을 등지고 토굴을 판 채 중앙아시아의 매서운 겨울을 났다.
당시 고려인들이 살았던 토굴 흔적은 긴 세월을 거치며 바스러졌다. 바스토베 언덕에 있었던 토굴 유적지는 국내 한 민간단체가 몇 년 전 이곳에 추모 조형물을 세우는 과정에서 훼손된 것으로 전해진다. 대신 인근에 있는 ‘고려인 역사단지’에서 증언을 토대로 재현한 토굴을 볼 수 있었다. 약 2m 높이에 5∼6평 크기로, 벽과 천장엔 단열재로 삼았던 갈대가 발려 있었다.
이곳에 동행한 우슈토베 주민 인발렌티나(81)씨는 갈대를 ‘깔’이라고 불렀다. 고려인 2세인 발렌티나씨는 자신을 ‘교동 인씨’라고 소개했다.
그는 “‘고려말’을 오래 아니 하다가 하려니 아주 힘듭니다. 어떤 말은 잊혔습니다”라면서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기억을 풀었다.
연해주의 작은 항구도시 포시에트에서 일곱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우슈토베로 넘어온 발렌티나씨는 강제이주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은 1937년에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전혀 말씀하시지 않았다”며 “예전엔 그런 주제로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카자흐스탄이 한국과 교류를 하게 된 1990년대부터 강제이주 사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발렌티나씨는 “카자흐스탄에서는 시쳇말로 ‘고려 사람들은 물도 없는 척박한 땅에 보내도 안 죽는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첫해 겨울 매서운 한파를 이겨낸 고려인들은 이듬해부터 놀라운 생명력으로 중앙아시아 대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우슈토베가 포함된 카라탈 지역에서 벼 재배 면적은 한때 여의도 면적의 150배 수준인 1만2000㏊에 달했다. 고려인의 개척력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높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소련이 뛰어난 업적을 달성한 노동자에게 수여하는 ‘노력영웅’ 훈장을 받은 지역 주민 31명 중 29명이 고려인이었다.
중앙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고려인 상당수는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았다. 덕분에 상당수 고려인은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다. 발렌티나씨 역시 부친의 “농촌에서는 대학에 못 간다”는 권유에 따라 일찌감치 인근 대도시 탈디쿠르간으로 향했다. 대학에서 수학과 독일어를 전공한 발렌티나씨는 우슈토베 부시장으로 24년간 재임한 지역 원로이기도 하다.
발렌티나씨의 정체성은 한국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고려인’이다. 1994년 한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는 발렌티나씨는 “한국은 크고 화려했다. 그러나 살기엔 카자흐스탄이 더 좋다”고 했다. 계란과 소고기가 풍성하게 들어간 ‘고려 국시’를 소개하며 “김치 물에다가 국수만 말아먹는 한국 국수는 국수도 아니다”라며 웃었다.
발렌티나씨와 같이 서툴게나마 한국어를 기억하고 있는 고려인은 이제 소수다. 120여개 민족이 거주하는 카자흐스탄 특성으로 인해 동포 3세부터는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흐릿하다. 최초 정착지인 우슈토베를 떠난 이도 많다. 10가구 중 7가구가 고려인 가정이었던 시절도 있지만, 지금은 한 가구가 채 못 된다고 한다. 발렌티나씨의 두 딸 역시 대도시로 떠나 카자흐스탄 원주민인 카자흐인들과 결혼했다.
핏줄은 당기는 것일까. 정체성은 약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국에 대한 젊은 고려인의 관심은 오히려 늘고 있다고 한다. 알마티에서 만난 고려인 3세 전옐레나씨도 그런 경우다. 옐레나씨가 태어난 곳은 카자흐스탄 인근 산악국가인 타지키스탄이다. 옐레나씨의 조부모는 1937년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타지키스탄으로 갔다. 그리고 1992년 타지키스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옐레나씨 일가는 다시 알마티로 향했다.
옐레나씨는 “할머니는 한국어를 썼고, 부모님은 러시아어만 썼다”며 “할머니 말을 어설프게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외국어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집 안에서 우연히 찾은 ‘고려일보’였다. 1923년 창간된 고려일보는 한반도 밖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글신문으로, 현재도 알마티에서 발행되고 있다. 낯선 글씨에 대한 호기심으로 할머니를 졸라 한글을 배웠다는 옐레나씨는 이후 카자흐스탄 국립대에서 한국학을, 한국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과 통번역을 전공했다. 현재는 전공을 살려 주알마티 총영사관에서 통번역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일반산문 부문 대상을 받은 옐레나씨는 수상작 ‘뿌리 깊은 나무처럼’에서 “한국어로 우리 가족의 역사를, 고려인들이 살아낸 치열한 삶의 장면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떳떳하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밝혔다.
민족 정체성을 알리기 위한 고려인들의 노력도 끊기지 않았다. 다음 날 찾은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은 연극 ‘나방’을 보기 위해 찾은 이들로 붐볐다. 200여석의 객석이 모두 찼는데, 관객 대다수는 고려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대사는 러시아어로 이뤄졌지만 일부 내레이션은 한국어로 진행됐다. 무대 양옆 대형 스크린에는 한국어와 카자흐어 자막이 표기됐다.
193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고려극장은 강제이주 당시 우즈베키스탄과 우슈토베를 거쳐 1968년 알마티로 옮겨왔다. ‘춘향전’, ‘심청전’ 등 한국 고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극을 우리말로 상영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이 노년에 이곳에서 관리인으로 근무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고려극장 로비 한편에는 홍 장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고려극장 부극장장이자 음악감독인 전라디온(58)씨는 “K팝이나 한국 드라마가 여기서도 인기를 얻다 보니 한국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현지인이 많다”며 “관객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상영한 ‘구미호의 포옹’에 대해 “나는 구미호라는 말도 몰랐는데, 한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더라”라며 웃었다. 극장 소속 배우 대다수는 고려인이지만, 한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이는 몇 안 된다. 라디온씨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친구는 50여명 배우 중 3∼4명에 불과하다”며 “배우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극장 밖으로 나가면 쓸 일이 없으니 쉽지가 않다”고 토로했다.
고려극장 역시 해방 80주년인 올해 특별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라디온씨는 “한국 연출가와 뮤지컬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더 많은 한국인이 고려극장과 같은 역사적 단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고려인이 한국을 기억하듯, 한국인들이 고려인을 잊지 않길 바라는 듯했다.
알마티·우슈토베(카자흐스탄)=백준무 기자 jm10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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