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고려인을 日첩자로 간주… 시베리아열차로 수송 [2025 신년특집-광복 80년 한국인의 디아스포라]

2025-01-05

고려인 디아스포라 형성 과정

함경도 떠난 농민들 연해주 정착이 최초

20세기엔 항일 독립운동 해외 근거지로

소련, 고려인 번성에 소수민족 통제나서

고려인들 3~4주간 열차 갇혀 이송당해

“노인·젖먹이, 봇짐 진채 소리없이 옮겨져”

노벨상 작가 솔제니친 작품서 묘사도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특정 민족의 집단 이주)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1937년 강제이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강제이주는 160년 고려인 이주역사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다.

고려인들이 러시아 연해주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학계에서는 함경도에 거주하던 농민 13가구가 두만강을 몰래 건너 연해주 지신허강 유역에 이주한 것을 최초로 보고 있다. 이들을 시작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가난과 탐관오리의 수탈을 피해 연해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조선인 이주민들을 ‘카레이츠’(고려 사람)라고 불렀다. 이를 직역한 ‘고려인’은 현재에도 중앙아시아 일대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통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20세기 들어서 연해주는 항일 독립운동의 해외 근거지로 변모한다. 32개의 마을이 들어설 정도로 고려인들이 번성하자, 독립운동가들 역시 이주 행렬에 가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영토인 만큼 일제의 영향력을 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1937년 강제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은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상처로 꼽힌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로 권력을 장악한 소비에트연방(소련) 중앙정부는 20년 뒤인 1937년 8월21일 연해주에 살고 있던 17만명가량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한다.

당시 소련 공산당은 고려인 사회를 일본 첩자의 온상으로 간주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소수민족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소련 정부가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는 고려인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강제이주를 강행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려인들을 태운 첫 수송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1937년 9월9일이다. 이들은 3∼4주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 갇혀 최소한의 식량과 식수만을 배급받았다. 열차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기차가 일시적으로 정차할 때마다 ‘볼일’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고 한다. 열차 안에서 사망한 이들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철길 근처에 묻혔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에서 당시 고려인 행렬을 “중풍 걸린 노인들로부터 훌쩍이는 젖먹이까지 거지 같은 봇짐을 진 채 신속하고도 소리 없이 원동(극동)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졌다”고 묘사했다.

9월 말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내린 곳이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다. 이곳의 원주민인 유목민족 카자흐인들은 낯선 고려인들에게 다가가 “무슨 중죄를 지었길래 이런 황무지에 버려졌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식인종’이라는 소문에 겁을 먹고 유르타(유목민 천막)를 정리한 채 도망친 카자흐인들도 있었다.

연해주 바닷가에서 온화한 계절풍 기후에 익숙했던 고려인들은 황량한 대륙에 적응해야 했다. 운이 좋은 일부 고려인은 카자흐인들의 헛간에서 지내기도 했지만, 상당수의 고려인은 토굴을 파고 겨울을 버텨야 했다. 혹독한 겨울 날씨에 숨진 노약자도 많았다. 1935∼1938년생 고려인이 아주 드문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알마티·우슈토베(카자흐스탄)=백준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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